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화학자다. 수줍음이 많았던 그는 유대인이라는 별 자각 없이 유년 시절을 보냈고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유대인을 탄압하는 파시스트 정부의 인종법 때문에 더 이상 학업은 이어갈 수 없었다. 이후 파시즘 저항운동에 참여하다가 붙잡혀 독일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년여에 걸친 수용 생활에서 끔찍한 일상을 보냈다. 당시 새로 들어온 수감자는 평균적으로 석 달을 버티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해방된 후 고향인 토리노를 밟기까지 유럽 각지를 돌아오느라 아홉 달이 걸렸다고 한다. 

그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후 집필한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는 당시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과 관찰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대 증언 문학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책은 체험과 기억에 대한 책임감, 날카로운 통찰과 유머로 삶을 성찰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중략) 우리 존재의 일부분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절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p.263)고 말한다.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꼭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었다”고 증언한다. 그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숙고해야만 한다. 

필자가 사랑하는 프랑스 출신의 에마누엘 레비나스는 유대계 작가이자 철학자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관한 연구로도 유명한 레비나스는 1923년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이데거가 진행하는 세미나에도 참석했고 1928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박사논문을 끝낸 후 파리에 있는 유대인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프랑스군 장교로 통역하는 일에 복무하던 중 독일군에게 체포되었고 가족들은 나치에게 몰살당했다. 그는 5년간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며 체험한 성찰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사상들을 이루었고 그 결과 ‘타자의 철학’을 이루어냈다. 

철학을 했던 그가 마주한 존재론은 ‘자기’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자기의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내재하려는 인식이지만 결국 그런 인식들이 나치즘과 전체주의로 발전한다고 믿었다. 즉, 타자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것은, 타자를 내 안으로 끌어들여 인식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나치즘을 직접 경험한 것을 토대로 ‘타자’는 자신이 어떤 수단으로든 간섭하고 제압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정의한다. ‘나’라는 존재에 의해 ‘타자’가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존재함으로써 ‘나’는 윤리적 책임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이론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는 결코 인식될 수 없는 존재이며 그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 타자를 우리 안으로 내재하려는 시도가 또다시 이루어질 거라는 뜻이다. 

레비나스는 상대가 누구이든 관계없이 그의 생명을 존중하고 윤리적인 관계를 맺을 때 ‘나’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타자는 단지 나와 함께 공존하는 ‘다른 자아’가 아니라 나라는 주체를 구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자이며 나에게 윤리적 책임을 갖도록 명령하고 호소하는 존재다. 타자의 생명과 고유성은 ‘성전聖殿’이며 우리 자신은 윤리성을 지키기 위해 타자가 유린되거나 다치지 않도록 수호하는 자이다. 존재론이 ‘나’의 세계로 귀환하는 사고라면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나’의 바깥 또는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자를 향하는 것은 형이상학이다. 

2024년 새해가 밝았다. 지구촌 여기저기서 축포를 터트리고 새해의 축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행복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도 새해의 단골 멘트다. 그러나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아이들이 죽어 나가고, 내일이 없는 캄캄하고 어두운 절망을 경험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그들은 ‘타자’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 관계없는 ‘타자’가 아닌 나의 유한성을 극복하게 하는 타자이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윤리성을 강조하는 ‘타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윤리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명령하고 호소한다. 우리는 전쟁 앞에 선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해야 하고 우리가 목격한 것을 증언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조건이다.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그 수많은 ‘타자’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온전히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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