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무 심어 여섯 동생 키워냈죠”

부모님이 물려주신 건 가난과 여섯 동생 뿐
척박한 땅 무 심어 3년 만에 땅 3000평 사

 
마땅한 비료나 퇴비가 없어 농사지은 수확물도 변변치 않았던 1950~60년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던 농촌 사람들의 이야기도 이젠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얘기가 됐다. 1970년대 이르러 농업기술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농촌에도 희망이 싹터 이전의 고생들을 모두 추억담으로 돌릴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받은 건 가난과 동생들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 사랑은 고사하고 제 밑으로 줄줄이 여섯 동생들까지 제가 책임져야 했습니다. 먹고 살아야 했고 동생들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정작 저는 배움이라는 것을 많이 가질 수도 없었죠. 언젠가 농사로 성공했음에도 학벌이 없다고 제게 올 뻔한 상을 놓쳤을 땐 정말 눈물이 나더군요”
김형주(72) 대표는 20대 후반이던 1970년대 초, 고향인 진위면 야막리에서 남의 땅을 빌려 처음으로 비닐 온상재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현재도 이곳에서 대규모 방울토마토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현대농장 김형주 대표는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잠시 말을 멈춘다.
“처음 농사지을 땐 무나 배추·상추 등을 심었는데 배추를 심으려니까 땅에 거름이 없어 잘 안됐어요. 그래서 무를 심었죠. 무는 비료만 줘도 잘 자랐거든요”
김형주 대표는 보통은 무가 6월 초에 나오지만 한 달 전에만 나와도 가격이 서너 배까지 높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러나 마땅한 영농기술이 없던 터라 비닐을 씌워 모종 키웠고 결국 노지 재배보다 세배 정도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무 한 개를 팔면 28원에서 30원 가량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돈은 땅 1평 가까이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서울로 출하, 야막리 채소는 최상품

“무 재배가 성공해 3년 만에 땅 3000평을 샀어요. 이후 수막재배를 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었죠. 처음에 멀쩡한 하우스를 때려 부수고 수막하우스를 짓고 있으니까 친구들이 다들 저를 가리켜 미쳤다고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수막재배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런데 수막재배를 하게 되면서 한겨울에도 쑥갓이나 상추도 키우고 여러 가지 채소들을 키워 비싸게 출하하는 것을 보고는 너도 나도 수막재배를 하기 시작했지요”
김형주 대표는 당시 서울 인근에서도 고작 1~2농가 정도가 수막재배를 하고 있을 정도였는데 규모화 해서 재배를 시작한 건 자신이 처음이라고 말한다. 국내 최초인 셈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채소들은 전량 용산도매시장이나 수원도매시장으로 출하를 했는데 ‘김형주 오이’하면 원체 상품성이 좋아 검수도 안할 정도였으며 덩달아 함께 시장에 내놓는 농사꾼들 까지 대우를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무와 배추 재배 이후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오이를 주로 재배했고 그 다음에 수막재배, 그 다음엔 자동화온실에서 방울토마토 재배를 했지요. 하우스만 8000평을 했었는데 지금은 1만 2500평 정도에서 재배하고 있습니다. 방울토마토는 다양한 곳에 수요가 있어 일기에 따라 높은 가격으로 출하되고 있지요”
김형주 대표는 현재 외국인들을 10여명 정도 고용해 농사를 짓는 대규모 방울토마토 농장 전문 경영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를 잇는 야막리 현대농장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대나무 온실을 하던 당시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폭설이 내렸는데 그때가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이었어요. 아버님의 운명을 지켜보는 동안 대나무로 만든 온실 열 동이 폭삭 주저앉아버렸지요. 그래도 꿋꿋이 일어섰어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덕분에 마을에서 이장도 하고 농민단체장도 하며 농사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눈이 틔게 되었지요. 그런 다양한 경험들은 경영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김형주 대표는 규모가 커지는 만큼 신경 쓸 일도 많지만 이제는 자식들이 있어 걱정을 덜었다고 말한다. 딸과 아들이 든든하게 자신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짓고 경영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모두 불러들여 농사를 짓도록 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제 뜻을 따라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직장에 매여 평생 남이 주는 돈 받는 것보다 내 농사 지어가며 속 편하게 살아가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현재는 남매가 같이 농사를 짓는데 딸은 벌써 4년, 아들은 이제 1년 정도 농사를 지은 햇병아리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김소미(44), 김동규(34) 씨는 아버지로부터 경영비법을 전수받으며 이론으로 배운 것과 현실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체험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때로는 현장에서 전혀 쓸모없어 지는 현상들을 누구보다 빨리 깨닫는 것도 평생을 몸으로 체득하며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항상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위면을 ‘수도권 채소 일번지’라는 별칭으로까지 이끌어내며 선진농법에 앞장섰던 김형주 대표, 농사도 자기노력 여하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고 말하는 김형주 대표는 몸소 체험으로 빚어진 노하우를 이제는 경영일선에 나선 딸과 아들에게 전수하며 더욱 탄탄하게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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