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항 개항 초기 동부두(2001년 10월)
평택항 개항 초기 동부두(2001년 10월)
우리나라 국제 무역항 가운데 전체 물동량 5위로 성장한 평택항(2019년 6월)
우리나라 국제 무역항 가운데 전체 물동량 5위로 성장한 평택항(2019년 6월)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원정리, 신영리 일원에 자리 잡은 평택항은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대진大津으로 불린 만호리 바닷가의 큰 어항으로서 성시를 이뤘다. 충청남도 당진, 서산 등 내포 지역 주민과 곡물, 가축 등 각종 물류의 이동 경로였고, 계절마다 제철 해산물이 잡혀 부둣가에서 판매됐다.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된 뒤 평택은 대당 교역로로 각광 받았는데 이는 원효가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인근에 왔다가 밤중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평택지방의 역할은 크게 위축됐는데 이는 당나라 말기 해상교역의 안전성이 위협받고, 고려 건국 후 예성강 유역을 중심으로 해상교역이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앙집권 강화로 인해 평택시 포승읍 대진大津을 비롯한 나루와 포구는 이전보다 훨씬 발달했다. 해운 운송이 발달한 평택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평택·안성 등 내륙에서 착취한 곡물과 소금을 비롯한 물산物産을 수송하는 곳으로 이용됐다. 평택항은 그 지리적 여건의 탁월성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 당시 포승지역에 제2 포항제철소를 계획하기도 했으나 10.26사태로 실행이 중단됐다.

평택항은 1986년 11월 1일 LNG 액화천연가스선이 처음 입항한 것을 계기로 그해 12월 5일 국제무역항으로 개항했다. 평택항은 인천항과 군산항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경부·서해안·평택~제천 고속도로, 경부선 철도 등 국가 주요 교통망이 효율적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국도 38호선, 39호선이 경유하는 등 배후 수송망이 완비돼 있어 수도권은 물론 남부권과의 연결성에서도 매우 양호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평택항은 포화상태였던 인천항의 대체항으로서 부산신항, 광양항과 함께 3대 국책항만으로 선정됐으며, 1999년 3월 17일 4492t급 오풍호가 입항해 중국 산토우로 운반할 석유화학제품 3800톤을 선적함으로써 서해안시대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2001년 10월 항공촬영한 왼쪽 사진은 1990년대 초부터 진행된 평택항 동부두 해상 매립과 부두 건설사업이 일부 준공한 시기에 서해대교 서남쪽 상공에서 촬영한 모습이다. 평택항은 2001년까지 관리부두와 포항제철 전용부두, 자동차 전용부두 등 15개 선석이 준공됐으며, 평택시 예산으로 평택항국제여객터미널을 신축했다. 사진 중앙부터 좌측으로 이어진 포승국가산업단지는 기반공사가 완료돼 공장 신축이 진행 중이며, 앞쪽 자동차 전용부두 왼쪽은 아직 매립이 이뤄지지 않은 공유수면 상태다.

2019년 6월 드론으로 촬영한 오른쪽 사진은 항공촬영 후 18년이 지난 모습으로 평택항 동부두와 서부두는 준공됐고, 내항도 단계별로 공사가 마무리되는 등 64개 선석에서 수·출입 활동이 왕성하게 이뤄지고 있는 모습이다. 

2001년 대비 2022년 평택항 운영현황을 비교하면 ▲운영 선석수 15→64개 ▲연간 수출입 선박 1만 8385→1만 6655척 ▲총 화물량 3968만 3000톤→1억 1613만 7000톤 ▲자동차 수출입 44만 7173대→163만 8490대 ▲컨테이너 2만 1111TEU→85만 1953TEU ▲항만 관련 업체 111개→371개 ▲항만 관련 종사자 1143명→6411명으로 집계돼 부문별 큰 폭으로 신장했다. 이 같은 실적에 힘입어 개항 40여 년을 맞는 평택항은 2023년 말 현재 국내 국제무역항 가운데 항만 전체 물동량 5위, 자동차 수출입 1위, 컨테이너 물동량 4위, 전자상거래 처리 건수 1위 등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글·사진/박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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