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궁중음식 중에는 간장이나 된장 대신 사용하던 ‘어육장’이 있었다. 조선후기 실학자가 쓴 <규합총서>에 “그 맛이 아름답기 비할 데 없다”고 기록했을 만큼 맛이 훌륭하고 귀한 장이다. 모든 음식에 어육장을 넣으면 감칠맛이 더해지고, 적당히 간간해져서 음식의 제 맛이 살아나 임금님 수라상에 올리는 음식에 사용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간장은 소금물에 메주를 띄워 만들지만, 어육장은 소금물에 쇠고기와 같은 육류, 꿩과 같은 조류, 대구·도미·가자미 등의 어류를 손질해서 말린 후 메주와 함께 항아리에 넣어 숙성시킨다. 일반적인 장은 짧게는 한 달에서 석 달 정도 숙성시키면 먹을 수 있지만 어육장의 숙성기간은 최소 1년이 지나야 한다. 그 전에 꺼내면 장에서 썩은 내가 나서 먹을 수 없으니 최대한 긴 시간을 두고 잘 숙성시키는 게 관건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숙성 과정에서 실패할 확률도 높아 서민들은 시도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두 가지 재료를 숙성시키는 건 대체로 숙성기간이 짧다. 육류는 육류끼리, 생선은 생선끼리 섞어서 숙성시키기도 하는데 이때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육장처럼 육류와 조류와 어류를 함께 숙성시키게 되면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고 실패할 확률도 높다고 한다.

숙성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기의 형체와 본성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형체와 본성으로 거듭나는 것을 뜻한다. 식품 속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등이 효소나 미생물의 작용으로 알맞게 분해되면서 특유의 맛과 향기를 생성하게 되는데 비록 형체는 사라졌지만 각각의 재료들에서는 맛볼 수 없는 깊고 풍부한 감칠맛이 깃든다. 

숙성된다는 것, 즉 본성을 잃는 과정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기와 갈치 등 종류가 다른 두 가지 생선을 한데 넣어둔다고 해도 조기는 조기 대로, 갈치는 갈치대로 각자 자기가 가진 본성이 있으니 그것을 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살던 공간이 전혀 다른 육류와 조류, 어류를 한데 넣어 숙성한다는 건 더 쉽지 않은 일이다. 육류는 육지에서 살던 본성이 있어 형체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자기의 본성을 지키려고 할 것이고, 조류나 어류 또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형체를 잃게 되었다고 해도 하나의 맛으로 어우러지는 건 또 다른 과정이다. 그렇게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육지나 바다에 살았다는 것도, 자기가 어떤 존재라는 것도 잊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가능해진다. 그래야 비로소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깊은 감칠맛이 있는 최고의 음식으로 거듭날 수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50~60년을 함께 산 부부 같다고나 할까. 연애할 때는 누구나 다투는 횟수가 많다. 각자 다른 공간에서 살았던 생활 습관이나 자기의 가치관 등이 확고해서 상대방에게 나를 인정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내 주장을 강요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배척하다 보면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생기게 마련이다. 어육장으로 치면 아직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썩은 맛이 나는 단계일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함께 부딪치다 보면 어느새 서로의 흉허물을 하나씩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부터는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아이에게 집중하는 법도 배운다. 그러면서 어느샌가 ‘나’가 아닌 ‘부부’ 혹은 ‘가족’이 되어간다. 살다 보면 자기를 버리지 못해 싸우고, 융화하지 못해 썩은 맛이 나는 경험도 하겠지만 부단히 자기를 내려놓는 과정을 견디다 보면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면서 그 가족만이 갖는 독특한 색깔을 갖게 되는 것, 앞서 언급했던 어육장은 그것이 모두 숙성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같다. 나를 내려놓고, 상대와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에게 스며들어 어우러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 깊은 맛을 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말이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서도 모두 그런 숙성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각자의 본성대로 자기를 내세우겠지만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인 만큼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숙성되어 가려고 노력한다면 충분히 훌륭한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개인들이 자기를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경계가 무너져 서로에게 스미는 때가 있을 것이고 그런 시간까지를 잘 견뎌내야 비로소 숙성의 경지에 이르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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