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비행하는 새의 무리를 가까이서 보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떠들며 날아가는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조용히 날아갈 것이라던 예상이 여지없이 깨진 것이다. 전깃줄에 앉아 있는 새들도 시끄럽긴 마찬가지다. 

새들의 생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새들이 지저귀는 이유는 서로 접촉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드넓은 허공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거나 무리 속에서 자신의 짝을 잃지 않기 위해, 혹은 자신의 영역을 다른 새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지저귄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새들의 지저귐에는 어떤 메시지나 내용이 담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그렇게 지저귐으로써 서로 같은 종끼리 접촉하는 수단으로, 또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하는 수단으로, 또는 같은 종족 속에 함께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 바로 새들의 지저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착안해 만든 것이 미니 블로그 형태의 ‘트위터’이다. 새들의 지저귐처럼 짧은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적는 트위터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빠르게 안부를 묻고, 빠르게 답하고, 손쉽게 소식을 전해 소통의 횟수를 늘려가는 형태는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킹이었다. 

페이스북이 등장하면서는 그보다 더 긴 문장도 가능해졌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올리는 기능도 추가되고 네트워킹 기능도 훨씬 강력해졌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일기처럼 활용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홍보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자기를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고 모르는 사람과도 연계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기존의 트위터처럼 짧은 문장에 사진과 영상을 올리는 장점만을 취했다. 어쩌면 긴 문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이미지에 더 친숙한 젊은 사용자들을 위해 최적화된 것처럼 보인다. 텍스트보다는 이미지 중심이어서 그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좋아하는 음식 사진을 올리기도 하고, 풍경 사진을 올리기도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거나 혹은 싫어하는 것을 표현해낸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은 모두 이용자들을 연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대의 빠른 속도에 맞게 답신도 빠르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을 정리하는 것도 순식간에 이뤄진다. 생각을 요구하는 피곤한 텍스트 대신 생각 없이도 쉽게 뜻을 파악하기 좋은 이미지들이 몇 초 사이에 휙휙 지나간다. 

종일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올린 음식 사진들을 보고, 그 사람들의 지인들을 보고, 그 사람의 짧은 생각들을 본다. 말 그대로 생각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다. 때로는 자랑도 보고, 일상도 본다. 올리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깊이 있게 숙고하거나 텍스트를 되새김질하지 않는다. 다만 새들의 지저귐처럼 그저 함께 접촉하고 있음을 느끼고 자신도 그 무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사진이나 글에 ‘좋아요’ 하나를 눌러주거나 짧은 댓글로 읽었음을 표시하는 정도에 머문다. 

전 세계인들이 그곳에서 남들에게 보여지길 원하고 자신이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를 표현하면서 호응해주길 바라고 그들로부터 인정받길 원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호응을 얻었는지를 보면서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이것은 이미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손을 맞잡아 인사하고, 서로의 표정을 읽고, 감정을 교류하는 것이 만남이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화면으로 만나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게 되면서 사람을 접촉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사람이 사람의 무리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고 감정을 교류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나 접촉 방식이 점차 달라지면서 깊은 유대를 맺는 것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서로의 이야기에 ‘좋아요’를 눌러 공감한다고 표시하면서도 그것마저도 쉽게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교류를 이어가던 사람도 쉽게 인연을 끊어낸다. 인연을 끊지 못해 쩔쩔매거나 감정을 다치는 일도 예전처럼 많지 않다. 헤어짐에 익숙한 만큼 인연을 맺는 일도 쉽다. 

모든 인간은 특별하다. 그리고 특별한 존재로서 깊이 이해받고 싶어 하고 조금 더 친밀하게 유대를 이어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현상들로 인해 인간의 내면은 상처를 입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타인의 표정을 읽는 능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은 공감 능력이 점점 떨어진다는 말과도 같다. 

인간을 이해하는 건 깊이 있는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사람의 역사를 알고, 그 사람이 어떻게 표현하며 살아가는지를 알고,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방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짧은 소통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결코 인간을 이해하는데 이르지 못한다. 다만 새들의 지저귐처럼 그저 연결하고 무리에 안착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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