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는 지인이 홍매화가 활짝 피어있는 사진을 보내왔다. 집 앞마당에 심은 홍매화는 아직 봉오리가 부풀지도 않았는데 남쪽 어딘가에는 마음 급한 봄이 서둘러 달려왔나 보다. 살면서 감동하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데 꽃이 핀다는 소식에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진다. 

며칠 전에는 다섯 살 꼬마가 초콜릿을 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표정이 세상을 다 가진 듯했기 때문이다. 초콜릿 하나만 있으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되는 신기한 마법을 보는 것 같았다. 마치 이 세상에 나와 함께 존재하는 아주 멋진 ‘작은 사람’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우리와 다른 별에서 내려와 세상을 온통 내 것으로 만드는 마술사처럼 말이다. 

우리도 한때는 친구와 놀며 얻은 구슬 몇 개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마치 개선장군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친 후 꾹 참고 때를 잘 민 대가로 얻은 바나나 우유 한 개에 세상 부러울 게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냉장고에 먹을 것이 쌓여있고 남에게 빌리러 가지 않을 정도의 돈과 집이 있어도 그때처럼 감동하고 행복해하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굳이 감동하려 한다거나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별로 없다. 무감각해지는 게 오히려 당연한 듯,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이나 감동보다는 그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웃음거리에 반응하는 일이 많아진다. 감정은 메말라 가면서도 오히려 행복하고 싶은 욕망은 점점 더 커지는 느낌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작품 <멋진 신세계>는 공상과학소설의 백미로 기계문명이 극도로 발달해서 과학이 모든 걸 지배하게 된 세계를 그리는 반유토피아적 풍자소설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고전 소설이 살아가면서 문득 생각나는 건 고전이 갖는 품격이자 위상이다. 

19세기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진화론의 거성인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이자 천재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600년 후의 런던이 배경이다. 이곳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사라지고 아이들은 공장에서 인공수정으로 태어나 유리병에서 보육 된다. 아이들은 자기 부모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오로지 지능으로만 우열이 판가름 된다. 자기에게 할당된 역할을 자동으로 수행하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고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고민이나 불안은 ‘소마’라는 신경안정제로 완벽하게 해소된다. 

이러한 세계에서 자란 린다는 인디언 보호구역에 놀러 갔다가 계곡에 추락해 인디언들의 구조를 받게 되고 거기서 아들 존을 출산한다. 그러나 성장환경이 달랐던 린다는 남녀 간의 사랑이 존재하고, 일부일처제를 따르고, 출산의 고통이나 질병, 마음의 갈등 같은 많은 고통이 존재하는 이 세계생활방식에 익숙하지 않아 비참한 삶을 산다. 

그러다가 린다와 아들 존은 구원받아 린다가 나고 자란 ‘멋진 신세계’로 돌아가게 되는데 오히려 야만인이었던 존은 육체적 행복이 완벽하게 보장돼 있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과 정서가 통용되지 못하는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문명의 삶과 원시의 삶을 모두 경험한 존은 두 세계에서 어느 게 진정 가치 있는 삶인지를 진지하게 되묻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은 문명 세계에서 폭동을 유도했던 존이 통치자인 무스타파 몬드에게 불려가서 하는 말이다. “전 편안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神을 원합니다. 저는 시詩를 원하고, 현실적인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선善을 원합니다. 저는 죄악을 원합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소설에서 예언한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런 세상에 발을 디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직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위험과 자유와 선악을 원하는 야만의 세계에 사는 우리와는 다르게 우리의 아이들은 멋진 신세계에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모든 게 속도와 편리함을 추구하며 빠르게 진화하고, 아이들에게 달 속에서 절구 방아를 찧는 토끼를 말하는 어른이 이상하게 여겨지고, 시가 철저히 외면받는 게 현실이 된 것이 그것을 방증하고 있지 않은가. 작가가 말하는 가장 인간다운 세상은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세상이 아니라 조금은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감정과 정서가 살아있는 세상이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도 그저 마냥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갈등과 불안 등을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돕는 형식이었으면 좋겠다. 인간보다 지능이 높은 AI가 있다 하더라도, 우주를 정복할 정도로 과학이 발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대신할 복제인간이 현실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유 없이 안부를 묻는 사람에게 감동하고, 다가오는 봄에, 이마를 간질이는 바람에, 대지를 깨우는 비에, 이유 없이 생각났다고 말해주는 친구가 있어 살 만한 세상이라고 느꼈으면 좋겠다. 초콜릿 한 조각에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는 아이처럼,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감정에 충실하고 그 정서를 표출함에 자유로운 삶이 진정한 우리들의 유토피아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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