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깬다는 ‘경칩’이 왔으니 꽃샘추위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이젠 완벽한 봄이다. 노란 산수유꽃이 얼굴을 내밀고 나면 잇달아 매화와 벚꽃도 질세라 희고 붉은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SNS에는 여기저기 아름다운 꽃 사진들로 넘쳐날 것이다. 

꽃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그 사람의 감정이 동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꽃을 보며 느꼈던 기쁘고 설레는 감정이 없었다면 사진을 찍는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꽃은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매개였을 뿐, 실제로 우리가 찍은 것은 기쁘고 설렜던 내면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삶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건 모두 감정의 소산이다. 만일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줄 수 없다. 행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이 움직여야만 한다. 그때부터 주변 사물과 관계를 맺게 되고 의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사랑, 자긍심, 야심, 경쟁심, 탐욕, 박애, 경멸, 욕망, 동경, 절망, 호의, 환희, 감사, 겸손 질투, 적의, 희망, 슬픔, 후회, 두려움, 미움, 치욕 등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이 모든 것이 감정이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꼭꼭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안에서 비집고 올라온다. 그것이 어떤 감정이냐에 따라 나의 행동이 달라지기도 하고 궁극적으로 삶이 변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감정에 대해서는 두루뭉술이 아닌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사랑’과 ‘끌림’이라는 감정이 있다고 했을 때 그 두 감정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르다. 타자와 마주쳤을 때 한없는 기쁨으로 충만해지고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감정이 ‘사랑’이라면 ‘끌림’은 사랑이 되지 못한, 어쩌면 사랑이 되기 전의 감정이다. ‘사랑’이 필연이라면 ‘끌림’은 우연에서 오는 기쁨이다. ‘사랑’이 나의 본질이라면 ‘끌림’은 나의 기분과 연관되어 있다. 나의 기분이 좋으면 더 많이 끌리고, 나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 해도 그다지 끌리지 않는 것과 같다. 

스피노자는 그의 저서 《에티카》에서 “끌림(propensio)이란 우연에 의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그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철학자는 이러한 끌림을 “사랑으로 만개하는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한 아련한 감정”이라고 해석한다. 

무언가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은 기분의 문제이지 본질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끌림과 사랑의 감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만일 누군가에게 끌리는 감정을 자주 경험한다면 내가 본질적으로 불행한 건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다른 예로 ‘기쁨’과 ‘슬픔’은 반대의 감정이 아니라 상대적인 감정이다. ‘기쁨’과 ‘슬픔’은 동시에 경험할 수 없다. 현재의 기쁨은 과거의 슬픔을 토대로 하고, 현재의 슬픔 역시 과거의 기쁨을 반추하게 만든다. 이에 대해서도 스피노자는 “슬픔은 인간이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보다 큰 완전성에서 오히려 작은 완전성으로 퇴행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어떻게든 그 슬픔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더 큰 완전성, 즉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만나 삶이 충만해질 때의 감정이 ‘기쁨’이라면 ‘슬픔’은 그러한 충만함이 사라졌을 때의 감정이다. 영원히 기쁨을 주는 타자도 있을 수 없고, 영원히 슬픔만을 주는 타자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그에 따라 감정도 변화한다. 지금의 기쁨이나 감정이 가장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후에는 그보다 더 최고의 감정을 경험할 수도 있다. 

만일 나 스스로가 아닌 타자로 인해 슬픔을 느낀다면 그건 없애려고 하지 말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감정은 순간적으로 생겨났다가 완벽하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영원하진 않지만, 지속적인 것 이 감정이다. 지금의 슬픔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다시 느껴질 수 있고 지금의 기쁨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느껴질 수 있다. 

감정에 대해 정확히 알고 의식적으로라도 감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건 중요하다. 우리는 매 순간 타자와 마주치게 되고 그 안에서 수많은 감정을 경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살아서 꿈틀거리며 육신과 정신을 조종하고 있다.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의 행동 기준은 대부분 ‘선 혹은 악’인 경우가 많다. 반면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기준은 ‘좋음 혹은 나쁨’이다. ‘선과 악’이 공동체 대다수가 내리는 평가 기준이라면 ‘좋음과 나쁨’은 스스로 내리는 평가 기준일 것이다. 지금 내 감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감정이 ‘좋음’이라고 느끼는 것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 삶에 경쾌함을 주는 ‘좋음’의 감정, 내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깨닫고 내 안에서 들려오는 그런 수많은 감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수많은 감정을 나의 삶에 단호히 관철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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