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잠에서 깬 후 기도하는 것은 오랜 습관이다. 아마도 가족 중 잠을 자다가 숨을 거둔 것을 목격한 후부터일 것이다. 딱히 마음에 모신 신은 없지만, 잠에서 깨어 삶을 다시 이어가게 해 준 절대자를 향해 겸허하게 고개를 숙인다.

잠을 자는 시간은 죽은 시간과 같다. 뒤척이거나 꿈을 꾸기도 하지만 그건 나의 자유 의지와 상관없는 무의식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잠을 자는 동안 우리는 관 속에 누운 시체처럼 스스로 움직이거나 자유롭게 생각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잠’이라는 무의식의 시간에 갇혀 있어야만 한다. 그 안에서 우리의 영혼은 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내부를 유영하며 이리저리 떠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다시 내 의지대로 몸을 움직이며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며 행운이다. 그러는 사이 태양의 온기를 받은 세포들은 다시 살기 위해 움직인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잠’을 관통하며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아무리 자고 싶지 않아도 그건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듯이 자고 싶지 않아도 잠은 자야만 한다. 그러나 잠을 자지 않으면 살아 움직일 수도 없으니 어쩌면 죽음은 우리를 살게 하는 근원이자 원동력인 셈이다.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 생을 마감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하루도 그러하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맞으며 활기차게 시작한 신체는 저녁이 되면 어둠에 갇히고 움직임도 둔해진다. 그리고 결국 자리에 누워 죽음으로 돌입한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습관처럼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탄생이고 죽음이다. 그런 탄생과 죽음이 하나 둘 이어져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간다. 어제의 나는 이미 죽고 오늘의 나는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우리는 매 순간 분절된 시간을 살아가고 그 분절된 시간이 결국 우리를 죽음으로 끌고 간다. 오늘 만나는 사람과 자연과 사물들은 어제와 다르고 오늘의 나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잠을 청한다. 

“현재의 현전은 현재의 모면할 수 없음에서, 현재의 어쩔 수 없는 그 자신으로의 회귀에서, 현재의 그 자신으로부터의 분리 불가능에서 기인한다.”(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현재의 나는 어제의 죽음을 관통했을지라도 다시 나 자신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레비나스의 말처럼 분리 불가능한, 그래서 체념해야 하는 부분에 속한다. 그럼에도 무언가 매듭이 있다는 건 묘한 안도감을 준다. 그것은 매듭을 짓고 난 후 또 한 번 새로 시작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매일 아침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자신을 환대해야만 한다. 

현재와 현재 사이에 깃든 기원이 모호한 막연한 슬픔과 마주쳤을 때, 그것의 본질은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가 닿을 수밖에 없는 저녁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그 저녁을 반복하다가 맞이하게 되는 죽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의 지성인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라고 말한다. 여섯 살에 겪은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보다 앞서 보내야 했던 딸과 손자의 죽음, 그리고 자신 앞에 놓인 죽음과 마주하며 노교수는 매일 밤 어둠의 손목을 잡고 죽음과 팔씨름을 한다고도 했다. 그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기 위해 인간은 채우기보다는 비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동안 끊임 없이 타자를 향한 관심과 관찰, 관계를 반복하며 자기의 스토리를 만들어왔다는 그분의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다. 

10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곡기를 끊으며 초연하게 죽음을 준비했던 스콧 니어링은 날마다 삶을 꾸리는 원칙을 이렇게 제시한다. 첫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 둘째,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라. 셋째,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넷째, 집, 식사, 옷차림을 간소하게 하고 번잡스러움을 피하라. 다섯째, 날마다 자연과 만나고 발밑의 땅을 느껴라. 여섯째, 농장 일 또는 산책과 힘든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여라. 일곱째, 근심을 떨치고 하루하루씩 살아라. 여덟째, 날마다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를 나누라. 혼자라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무엇인가 주고,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를 도와라. 아홉째, 삶과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라. 할 수 있는 한 생활에서 유머를 찾아라. 열째, 모든 것에 내재해 있는 하나의 생명을 관찰하라. 열한 번째, 모든 피조물에 애정을 가져라. 

스콧 니어링도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던 이어령 교수도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그들이 죽음을 사유하는 태도를 보며 깨닫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죽음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어야 한다는 것, 다만 순응하며 언제가 될지 모를 끝을 향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부단히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