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자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제법 저렴하게 나온 삼박 사일 제주도 여행상품을 보니 변변하게 부모님 여행 한번 못 보내 드린 죄스러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집어 들고 여행상품을 예약했다. 아마도 지금의 선택은 훗날 더 큰 후회를 줄이는 계기가 되리라 확신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부모님이 가장 걱정하는 건 경비나 여행 일정이 아니라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까지의 과정이다. 아무리 종이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세히 설명해도 부모님은 반 정도 흘려듣는다. 이번에도 결국엔 공항까지 가서 표를 끊어드리고 손 흔들며 배웅까지 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공항, 비록 부모님을 핑계 삼긴 하겠지만 아마도 다음 달이면 나도 공항에 갈 기회가 생길 것이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매일 보는 얼굴들이 지겨워지고, 밀고 당기는 연애도 시들해지면 전철을 타고 공항엘 간다고 한다. 특별히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공항에 앉아 어디론가 분주히 떠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잃었던 식욕도 살아나고 죽었던 감흥도 살아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여행에서 지쳐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왠지 자신도 집으로 가야 할 것만 같은, 오래 비워 둔 방이 그리워지는 느낌이 든다고 말이다. 그에게 있어 공항은 삶의 출발과 종착이 어디인지를 일깨워주고 다시 희망을 불어넣는 교과서 같은 곳이다. 

일상이 되어버린 피로, 그리고 삶에 대한 염증이 우리의 목덜미를 끌고 가려 할 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최대한 우리를 깨어있게 만들어 줄 낯선 환경을 찾는 것이다. 제주도에서 잡은 고등어를 살아 있는 상태로 서울에서 먹을 수 있게 하려면 수족관에 고등어와 천적을 함께 넣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처럼 말이다. 공항에는 그런 묘한 긴장이 있다. 그리고 일정한 긴장을 바탕으로 하는 설렘이 있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도 그의 산문집에서 “집에서 슬프거나 따분할 때면 가 볼 만한 곳이 공항”이라고 말한다. 아니, 어쩌면 내 지인이 알랭 드 보통의 산문집을 읽고 따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공항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라 삶의 긴장을 다시 찾기 위해 간다는 사실이다. 

한때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즐겨 읽던 나로서는 그의 사유 방식이 참 독특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가 마주한 공항이라는 공간은 내 지인이 떠올린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보통이 생각하는 공항은 탈주를 시작하기 직전의 공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행자들은 곧 여행을 잊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사무실로 돌아갈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의 대륙을 몇 줄의 문장으로 압축할 것이다. 배우자나 자식과 다시 말다툼을 시작할 것이다. 영국의 풍경을 보며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매미를 잊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보낸 마지막 날 함께 품었던 희망을 잊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두브로브니크와 프라하에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알랭 드 보통, 『공항에서 일주일을』)

돌아온 사람들은 곧 여행에서의 설렘을 잊는다. 그러나 머지않아 곧 다시 떠날 채비를 한다. 저마다 가방을 끌고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며 줄을 서 있는 그들의 모습에선 삶의 무력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공항은 무력감을 떨쳐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상 속 공간일지 모른다. 이륙을 기다리는 비행기들은 마치 먹이를 향해 금방이라도 돌진하려는 표범들 같다. 날렵하게 몸을 솟구쳐서 저만치 먹이를 덮치는 표범들, 여행객들은 비행기를 타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볍게 몸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 피로의 세상에서 멀어질 수 있다면, 내가 나에게서 가능한 멀어질 수 있다면 하는 희망을 안고서 말이다. 

“오후 세 시,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시간, 감정에 깊은 크레바스들이 파여 있을 때, 늘 어딘가로 이륙하는 비행기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알랭 드 보통, 『동물원에 가기』)

공항은 어떤 장소보다도 특별한 곳이다.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교차하고, 많은 인종과 많은 문명이 뒤섞이고, 흥분과 설렘, 귀소본능의 그리움이 흘러다니고, 고요하지 않고 무언가 계속 살아 움직인다.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사이의 공간,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공항은 “정의되지 않은 방향 전환의 거처” 같은 곳이다. 여행이든, 출장이든, 이주든 삶에서의 탈주가 실현되는 공간, 출국심사대를 통과할 때마다 왠지 다른 존재가 되는 듯한 느낌은 아마도 그런 탈주의 쾌감이나 혹은 하루아침에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묘한 긴장감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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