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역사도 역사다

힘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일제 36년. 왜놈들에게 온갖 수탈을 당하고 해방된 지 몇 해나 되었다고 다시 찾아든 6·25 민족상잔.
그나마 자리를 잡으려던 나라는 이념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분야에서 절차와 과정은 송두리째 무시되기 일쑤였습니다.
1970년 초
낯선 고장 평택에 살기 시작하며 송탄읍 도일리에 위치한 고요한 원균 장군 묘소는 마치 전생으로 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연이었던 것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고단한 일상을 되돌아보는 사색의 장소였습니다.
평택읍에서 버스를 타고 도일리 버스종점에 내려서 걸어가거나 아니면 차를 타고 가기도 했습니다. 이미 달아오른 햇살에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가는 초여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풀숲에 앉아서 원균 장군 무덤을 바라보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밑도 끝도 없는 생각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그렇게 얼마간 세월이 흐른 뒤 원균 장군 묘소에는 전에 보지 못하던 석물石物들이 세워졌습니다.
-선무일등공신 원균
그러기에 어느 날 갑자기 들어 찬 석물을 보고는 실망이 아니라 절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 역대 왕릉에 가면 무덤 앞에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역대 어느 왕릉에 세워진 문인석과 무인석 모양새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문인석과 무인석은 곧 왕이 재위하던 그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은 물론 무덤 속에 묻힌 임금이 살아생전 역사에 남긴 발자취 곧 치적治積을 상징한 것이기에 조선왕릉 문인석과 무인석은 학술적 연구대상이 되고 있기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원균 장군 묘소에 세워진 석물은 석공이 하나하나 공을 들여 손으로 돌을 쪼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요즈음 세간에 널리 퍼져있는 중국에서 기계로 깎아 조악하게 만들어 들여온 석물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선무일등공신 원균 장군의 역사적 업적에는 전혀 격에 맞지 않는 초라한 것들이었습니다.
너무 서둘러 만들었기에 석물이 오히려 원균 장군의 품격을 깎아내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평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충남 아산군 음봉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가 있습니다. 이미 이순신 장군은 우상화를 넘어서서 신격화가 되어져 있던 시기였습니다. 규모나 주변 경관이 왕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전혀 손색이 없는 장대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원균 장군과 이순신 장군 두 분은 역사에서 더하고 덜하고가 없는 똑같은 ‘선무일등공신’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원균 장군 묘소는 찾는 사람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세간의 어느 부잣집 묘소보다도 더 옹색하고 협소하기만 한 것일까!?
일등만이 기억되고 존중받는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사회적 병폐는 공존을 위한 경쟁을 넘어서서 부당한 과잉경쟁에 집착한 나머지 부정과 부패 비리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정치가 그러하고 스포츠도 예외가 아니다 보니 사회 전반적으로 집단이기주의마저 팽배한 세상이 되고 만 것이지요.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업적은 마땅히 존경 받아야 하며 어떤 역사에서도 결단코 폄하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세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민족적 배신까지 서슴지 않았던 한 독재자가 자신의 허물과 야욕을 눈가림하기 위해 국민적 구심점을 만드는 과정에서 상대방 인물의 없는 일까지 날조해서 역사적으로 이룬 업적마저 의도적으로 깎아내렸다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실패한 역사도 역사입니다. 일시적인 실수나 실패가 있었기에 다시 새로운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난 이후 대한민국 도회지는 물론 산간벽촌 어느 초등학교엘 가도 학교 마당에 조형물로 서있는 이순신 장군.
그래서 많은 학교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수업시간에 원균 장군은 임진왜란의 ‘조연’ 이자 ‘악역’으로 둔갑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어릴 때 잘못 배운 지식은 두고두고 머릿속에 세뇌되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평택에서 20여년을 지내는 동안 지역주민을 대표하는 어느 누구도 원균 장군을 당당하고 정의롭게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부끄러워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가만히 숨죽이고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고 나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군사독재 시절은 물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서도 원균 장군에 대한 위상은 달라지고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평택시사신문이 창간되어 편집국장을 신문사 사무실에서 만나던 시간 ‘평택시사신문’이 지역사회를 위해서 헌신해 줄 것을 몇 가지 부탁하는 가운데 원균 장군 업적을 재조명하는 사업도 우선되어져야 할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국가적인 재평가와 인식변화를 기대한다면 먼저 지역사회부터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간에서는 국정원장을 지낸 원 씨 한 분이 재임시절 저지른 불편부당한 일로 나라 안이 어지럽습니다.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분별력을 잃고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조상님의 명예와 업적을 깎아내리는 낯 뜨거운 일입니다.
꼴뚜기가 어물전 망신시키고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듯 옳지 못한 처신으로 조상님을 욕되게 하는 일은 역사에도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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