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한(恨), 장학금 전달로 대신해”

미망인으로 4남매 키우며 혼수바느질 생활
30여 년간 장학재단에 해마다 장학금 기부

 
남들보다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남은 생에 대한 애착이 커져서 타인 보다는 자신을 더 많이 돌아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남들이 편안한 삶을 추구하게 되는 60대부터 어려운 이들을 위해 힘들게 모은 재산을 나누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30여 년 동안이나 꾸준히 실천에 옮기고 있는 91세 어르신이 있다.

포목점과 혼수바느질로 생활 꾸려
“일제 때 정신대에 끌려갈까봐 부모님이 나를 열아홉에 시집보냈어요. 내 나이 서른 살에 남편이 세상을 등지자 혼자서 4남매를 가르치며 생활해야 했는데 여자가 할 수 있는 장사 중에 가장 만만해 보인 것이 포목점이었지요. 그때부터 아이들 데리고 먹고 살기 위해 낮에는 포목점을 하고 밤에는 잠 안자고 혼수바느질을 했어요”
평택중앙로타리클럽 명예회장인 김홍금(91) 어르신은 살아온 지난 얘기를 들려달라는 말에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며 손 사레를 친다. 구십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을 겪어 이제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는 듯 편안하게 웃는 어르신이지만 미망인으로 살아가며 힘들게 4남매를 키웠던 일들은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포목점 하며 돈을 조금 벌어 집도 지었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 7개월 만에 그만 폭격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그때부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지요. 물건을 구하기 위해 아이를 업고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가야 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았는지. 차비가 없어 공짜로 기차를 타다 끌려가는 사람도 있어 내가 몇 번인가 그런 사람들한테 차비랑 점심값을 주었던 기억이 나요”
김홍금 어르신은 당시를 기억하며 허허 웃는다. 가난하게 살던 시절에도 힘든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어르신은 32년 간 포목점을 하며 남는 자투리로 바지를 만들어 이웃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그리고 사남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가 되자 이제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잇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어려운 학생 50여명 장학금 지급
“불쌍한 아이들 두 명이라도 좀 가르쳐 보자고 장학금을 주기 시작한 일이 벌써 30여년이나 되었나 봐요. 내가 못 배운 게 한이 돼서 아이들이 50여명 인데 그 공부를 가르쳐야 겠다 생각하기도 했을 거예요. 그렇게 가르친 아이들 중에서 벌써 박사가 4명이나 돼요. 예순 네 살부터 해마다 3000만 원씩 장학재단에 기부했으니까 내가 죽더라도 장학금은 계속 지급되겠지요”
김홍금 어르신은 64세 되던 해부터 기부한 장학금이 벌써 2억 4000만 원이나 된다. 이 돈은 어르신이 겨우 2~3시간 새우잠을 자고 밤을 낮 삼아 일하며 힘들게 마련했던 돈을 기반으로 한 것이어서 더 애틋하다. 그래도 어르신은 단 한 번도 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장학금을 받은 아이들이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했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많이 사라졌어요. 처음부터 보답이나 인사를 바라고 한 게 아니니까 그다지 서운하진 않아요. 아이들이 찾아오면 옷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하는데 아이들이 취직하고 잘 살아간다는 소식을 듣는 게 제 유일한 보람이지요”
김홍금 어르신은 아이들에게 항상 이르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건 바로 “공부해야 고생을 조금이라도 면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사람이 되려면 항상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 덧붙이는 말이 있다면 “항상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로타리클럽 최초 여성 명예회원
“내 명의로 된 건물이 있는데 자식들에게는 미리 건물에서 나오는 집세는 내 마음대로 할 거니까 상관하지 말라고 말을 했어요. 그래서 집세가 나오면 장학금도 주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내놓기도 해요. 아이들은 항상 어머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시라고 말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밖에 없으니…”
김홍금 어르신은 평택시 각지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항상 성금을 기탁하며 마음을 보태고 매년 사회봉사 활동에도 빠지지 않고 동참했다. 이런 일들이 알려지면서 인연이 시작돼 어르신은 1997년 남자들만 있는 평택중앙로타리클럽 최초의 여성 정회원으로 입회했고 현재는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죽을 땐 10원짜리 한 푼도 갖고 가지 못하는 게 사람이잖아요. 남들은 늙으면 해외여행도 가고 좋은 것 입는다는데 난 해외여행도 몇 번 가봐서 더 가고 싶은 맘도 없고 옷도 내가 만들어 입으니까 사 입을 필요도 없어요. 그 돈 있으면 애들 장학금 한 푼이라도 더 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지요”
올해 아흔 둘의 나이로 여장부 소리를 들으며 평생을 살아오신 김홍금 어르신, 학업을 잇기 어려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힘들게 모은 것들을 아낌없이 내주시는 어르신의 얘기를 들으며 문득 가슴이 먹먹해진다. 예전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기위해 당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던 엄마의 마음이 바로 이런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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