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협박(脅迫)·회유(懷柔) 물리치고 대의명분(大義名分) 위해 절사(節死)한 삼학사(홍익한·오달제·윤집)

▲ 화포 홍익한의 묘와 비각(팽성읍 본정리)

한국사회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1970~80년대 급격한 개발로 인한 성장통을 겪어오면서 과거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를 갖지 못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특히 국가 차원에서는 성찰의 기회를 갖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있지만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이 같은 움직임이 요원한 상태다. 평택은 내년이면 이 땅에 평택사람들이 살아온 이후 처음으로 지금의 평택과 같은 행정구역의 모습을 갖춘 지 100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가 된다.
<평택시사신문>은 ‘행정구역 통합 평택 100주년’을 맞아 ‘평택사람의 흔적 찾기’ 일환으로 지난 8월 8일부터 11일까지 4일간 학계와 향토사학자가 함께 ‘중국 속에서 평택 흔적 찾기’를 진행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농업정책으로 이주한 길림성 평택툰 ▲진위면 가곡리 경주이씨 종토(宗土)를 팔아 세운 신흥무관학교 ▲삼학사 중 평택 출신 홍익한 오달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심양(瀋陽)과 그 곳에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이야기를 6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의리와 명분의 아이콘 홍익한과 오달제
사람들은 일상적인 생활보다는 어려웠던 시기를 잘 기억하고 있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평화로운 시대는 잘 기억되지 않지만 위기를 극복한 인물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새롭게 인식되거나 평가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삼학사다. 삼학사는 청(淸)의 침략에 맞서 명분과 의리를 지킨 상징적인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학사의 이러한 인식은 훗날 재조명을 통해 우리 역사에서 부활됐다. 이는 청에 패한 조선의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한편 여말선초(麗末鮮初)로 상징되는 사회변동의 요소 중의 하나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통치이데올로기로써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어나갔다. 성리학은 무엇보다도 명분과 의리를 중요시했다. 때문에 조선의 사대부는 명문과 의리를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더욱이 이민족인 여진족의 침략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문과 의리가 강조됐다. 
평택에는 척화파였던 삼학사의 세 학자 중 두 인물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팽성읍 본정리에는 이곳에서 태어난 화포 홍익한(花浦 洪翼漢)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송시열이 지은 비와 묘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돼 남아있고, 이충동 동령마을 서편 이충택지지구에는 오달제(吳達濟)의 유허비가 평택시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돼 보존돼있다.

▲ 홍익한을 기리는 비가 있는 홍학사비각(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 오달제를 기리는 비가 있는 충의각(평택시 이충동)

 
여진족(淸), 조선을 침공하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을 혼란과 격변의 시기로 바꿔놓았다. 그동안 만주를 주요 무대로 분열됐던 여진족은 명(明)의 감시가 약한 틈을 기회로 누루하치의 지도 아래 통합을 하고 다시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이에 명의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조선은 명·청의 격렬한 쟁탈전에 휘말리게 됐다.
여진족은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누르하치가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여진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1616년에 후금(나중에 청으로 국호를 고침)을 건국했다. 조선은 광해군 집권 시에는 후금과 중립 외교 정책을 펴며 전쟁을 피할 수 있었으나 반정으로 새로운 임금이 된 인조는 기존의 중립외교를 폐기하고 명을 숭상하고 청을 멸시하는 외교노선을 택했다. 그 결과 청으로부터 두 차례 침입을 받았다. 청은 세력이 점차 강해지자 1627년에 조선을 침입했는데 이를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한다. 정묘호란 때 후금의 요구는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동안 조선이 형의 나라, 청이 아우의 나라였는데, 이를 조선에서 받아들이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일단 청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겉으로는 명과 단교를 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명과 교류하였다. 이를 핑계로 청은 1639년 다시 조선을 침공한다. 스스로 황제라 칭한 청태종은 앞서 요구한 형제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조정하고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청에 보내라는 통보를 했고, 11월 왕자 대신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신하들을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지만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자 그해 12월 바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었다.
인조는 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군이 이미 홍제원에 도달해 길을 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왕을 호위하는 군사는 1만 3000명, 군량은 50일분밖에 되지 않았다. 청군은 12월 16일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다음해 1월 1일에는 청태종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직접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 홍익한과 오달제, 윤집 캐리커쳐(평택문화원 자료)
홍익한·오달제 등 삼학사 청에 끌려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산성에서는 청과 화해를 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파가 대립했다. 주화파는 최명길, 척화파는 김상헌과 홍익한·오달제·윤집 등 삼학사였다. 강화도로 피신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포로가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남한산성에서도 더 이상 싸울 힘을 잃고 주화파인 최명길의 주장을 받아들어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홍익한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결정하던 날, 평양(平壤) 서윤(庶尹)에 임명이 됐다. 주화파의 최명길은 “척화하여 청의 침략을 초래한 자는 홍익한이니 지금의 서로지임(西路之任:평안도 일대)은 그 말고 누구이겠는가?”라고 하며, 당시 결원 중이던 평양 서윤에 임명하여 홍익한을 죽음의 땅으로 내몰았다. 홍익한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그의 처지를 동정하자 홍익한은 오히려 “순국(殉國)·사적(死 敵)하려는 것이 평소 지녔던 마음이다”하며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홍익한은 적진을 뚫고 20여일 만에 부임해 평양성을 보존하게 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강화도에 있던 두 왕자가 붙잡히자 사기가 떨어진 인조는 결국 항복하고 두 왕자와 화의에 반대한 신하를 잡아 보내라는 청나라의 요구에 홍익한도 평양 두리도에서 체포돼 가장 먼저 압송됐다. 청태종은 가장 격렬하게 청과 화해를 반대하고 싸움을 주장한 인물로 홍익한을 지명했다.
뿐만 아니라 강화도에 있던 홍익한의 가족들은 청군에게 희생됐다. 마니산에서 교동으로 향하던 가족 일행은 추적하던 청군과 마주하게 되는데, 욕당하지 않으려는 계비 허 씨에게 청군이 칼을 휘두르자 아들 수원이 대신  맞아 숨졌다. 허 씨는 물에 뛰어들었고, 수원의 부인은 칼로 자결을 했다. 작은 아들 수인 역시 청군에게 하루 전날 이미 목숨을 잃었다. 겨우 홍익한의 어머니와 두 딸만 목숨을 유지했다.
▲ 오달제 캐리커쳐(평택문화원 자료)
오달제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에 부교리로 있을 때 청이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청나라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화파인 최명길·이민구 등의 주장에 따라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척화를 주장했다. 이듬해 인조가 지금은 서울 송파구인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청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요구하자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서 홍익한·윤집 등과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다.

중국 심양 중산공원서 절사하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홍익한 등 삼학사는 잊힌 인물이었다. 노모와 어린 자식들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한 인조였지만 오달제와 윤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저 물질적인 지원을 하는데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익한의 가족에는 죄가 있다고 하여 홍익한이 죽은 지 3년 후에나 쌀 12말·콩 2말을 지급했다. 이러한 삼학사의 위상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인조도 자신이 청태종에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머리를 찧던 치욕적인 일이 홍익한 등 척화파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청태종으로부터 척화파를 내놓으라고 요구를 받고 이들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현실은 삼학사를 기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동안 잊혔던 삼학사는 1681년에 가서야 명예가 회복됐다. 남한산성에 현절사를 세워 삼학사를 위무(慰撫)했으며, 홍익한에게 충정(忠正), 오달제에게 충렬(忠烈), 윤집에게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로써 홍익한과 오달제 등 삼학사는 충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학사가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송시열이 <삼학사전>을 간행하면서부터였다. 송시열은 국난을 당해 의리를 지키며 죽는 데는 자결(自決)·전사(戰死)·절사(節死)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 포로가 되어 절사하는 것이 명교를 후세에 드리우는 가장 귀한 죽음이었다고 했다. 적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자신의 대의명분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논리로써 이를 삼학사에서 찾았다. 이와 같은 명분과 의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흔적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심양시 중산공원(中山公園)이다. 이에 앞서 청에 끌려온 홍익한·오달제 등 삼학사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묶었던 조선관(朝鮮館)에서 함께 지냈다. 홍익한과 오달제가 절사한 중산공원과 그들이 머물렀던 조선관은 비록 중국 심양에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고국에 머무르지 않을까 한다. 
 

▲ 홍익한·오달제·윤집의 업적을 기술한 삼학사전(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추담 오달제의 친필

▲ 추담 오달제의 필묵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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