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어·꽃게 쉴 새 없이 잡혔던 ‘평택의 해수면어업’
화려했던 옛 명성을 이어 평택 어업의 부활을 준비한다

▲ 현덕면 어촌 풍경(1920년대)
평택은 내수와 해수가 만나는 합수지점이고 리아스식 해안구조를 가지고 있어 갯벌이 발달했으며 조수간만의 차가 컸다. 평택의 어민들은 바다와 갯벌의 생태적 변화와 생물자원에 대한 이해를 생활 속에서 전승하며 삶을 영위했다. 평택호방조제가 준공된 1974년 이전까지만 해도 아산만에 연해 있는 여러 마을들에서는 농업과 어업을 생계의 바탕으로 꾸려갔다. 그러나 평택호방조제 축조 이후 평택지역의 어업과 수산업·제염업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물 반, 고기 반’이라던 어업은 어획량이 급격히 감소했다. 또한 갯벌의 생태변화와 오염은 갯벌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갯일이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 동진염전 뒤 흔들다리(1975년)

1970년대까지 흥한 평택의 바다어업
포승읍 만호리 앞 아산만 일대는 바다가 낮고 잔잔할 뿐만 아니라 진위천·안성천와 삽교천 하구에 위치해 최적의 산란장소를 제공함에 따라 다양한 어종이 회유하는 곳이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평택의 어민들은 전통적인 어법인 독살·덤장·개막이그물·주목망·안강망·삼중망·꽃게그물·장대그물·낭장 등 여러 어구를 사용해 철마다 조수를 따라 이동해 오는 삼치·조기·강다리·숭어·꽃게·넙치 등의 물고기를 어획했다. 또한 갯벌에 서식하는 망둥어와 낙지도 많이 잡았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진위·평택현 토산물에 붕어·숭어·게·지황이 산출된다고 했으며 1894년에 간행된 <진위현지>에는 진위현의 특산물 중 붕어·게·생지황·향부자·금은화 등을 적고 있는데 붕어와 게는 진위천의 옛 이름인 장호천의 특산물이었다. 조선후기만 해도 먼 바다에서의 어로활동이 여의치 않아 내수면과 가까운 바다에서 어획되는 어종과 패류에 대한 기록의 한계가 있으나 평택지역은 서해에 접해 있고 진위천과 안성천 등 4개 대형 하천이 접하는 곳으로 다양한 어로활동이 전개됐다.
평택 연안에 위치한 아산만 갯벌은 현덕면 권관리로부터 북쪽으로 장수리 서부 갯벌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갯벌은 육지에 근접할수록 ‘뻘’의 모습을 띠고 있으나 바깥 바다 쪽으로 나가면서 모래질 갯벌로 바뀐다. 이 갯벌에서는 걸음을 내디딜 수 없을 정도로 바지락과 굴·여타 조개류가 풍부했으며 낙지를 비롯해 맛 채취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평택지역에서 해안을 직접 접하고 있는 지역은 현덕면 장수리·권관리·기산리·대안리·신왕리·덕목리 일대와 포승읍의 신영리·희곡리·만호리·원정리·홍원리 일대, 그리고 안중읍 삼정리와 오성면 길음리 일대였다. 특히 현덕면과 포승읍 일대는 어업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권관리의 계두진·대안리의 구진·신왕리의 신흥포·신영리·장수리 일대에서 특히 어업이 발달했다.

▲ 포승읍 만호리 앞바다 풍경(1980년대)

바다와 함께한 어민들의 삶
평택해안에서 잡은 물고기와 다양한 어류들은 현덕면의 아산만과 안성천 하구의 뱃길을 거쳐 육로교통을 통해 안중·발안·수원을 거쳐 서울로 유통됐다. 바다에서의 어획이 풍어라 해도 당시 교통수단과 도로망 등 운송시스템이 원활하지 못하고 어물에 대한 소비 수요가 낮아 어획물을 순조롭게 판매할 수 있는 어물전이 활성화되지는 않았다. 때문에 생물을 유통시키기 위해 햇볕과 바람에 건조시키는 방법과 염장이 발달했으며 봄철에 잡은 숭어는 농부들의 겉보리와 맞교환 하는 등 물고기 유통을 대신하는 방법들이 성행했다.
대동여지도 기록에 의하면 평택지역의 소금생산은 대체로 권관리·장수리·대안리 일대에서 이뤄졌으며 조선후기까지 여겨졌던 전통적 방식의 소금생산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방식의 소금생산, 즉 화염과 천일염 생산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평택에서는 천일염보다 오히려 바닷물을 솥에 넣고 끓여 제조하는 ‘화염’ 또는 ‘자염’이라는 소금생산이 주를 이뤘다. 소금이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돌면 각처에서 소금장수들이 몰려들었는데 안성이나 오산처럼 먼 곳에서 온 상인들은 하루 전부터 주막에 묵으며 소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구하기 어려우면 연줄을 넣기도 했는데 그만큼 소금은 귀한 것이었다.
평택지역에는 상당수의 어전이 존재했다. 어전은 고기 잡는 시설의 일종으로 바다 가운데 얕고 길게 생긴 곳을 골라 조류가 밀려올 때 일부를 열어놓고 물이 빠진 후 고기를 잡는 어구다. 조선시대 평택지역의 어전 수나 규모 등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해 정확한 실상을 파악할 수는 없으나 1807년 해일로 인해 평택현 등에서 36곳의 어전이 파괴됐다는 사실은 평택에도 상당수의 어전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해일은 1392년부터 1903년까지 모두 44회에 걸쳐 일어났으며 지역적으로는 서해안 34회·동해안 7회·남해안 3회 등으로 평택이 위치한 서해안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중 평택에서 발생한 해일은 폭풍에 의한 해일로 8회에 걸쳐 6월부터 9월 사이에 발생했는데 백중사리와 막사리 때는 피해가 극심했다.

▲ 포승읍 원정리 앞바다 낙지잡이(2013년)

평택 해안지역 삶의 흔적들
평택은 해안지역에 위치한 만큼 바다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포승읍 원정리에 위치한 수도사에는 원효와 관계된 설화가 전해지는데 그가 당으로 가기 위해 배를 기다렸던 곳이 원정리며 이곳에서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화로 미루어 평택이 당시 대당교역로였음을 말해준다.
심복사에는 창건설화가 전해지는데 보물 제565호로 지정된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파주군 몽산포에 살던 천 노인이 덕목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고 전한다. 이 설화로 미루어 당시 평택은 파주에서 고기잡이를 올 정도로 어획량이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영웅바위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밖에도 평택에는 바다와 관련된 설화가 많이 존재하고 있다.
평택에는 다양한 어업노동요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닻 감는 소리 돛 다는 소리’나 ‘노 젓는 소리’ ‘고기되는 소리’ ‘그물 다는 소리’ ‘그물 뽑는 소리’ ‘배치기’ 등이 전해지며 그밖에도 풍어를 기원하는 노래, 배가 바다로 나갈 때 불렀던 노래, 고기를 푸고 담을 때 부르던 노래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일제에 의한 경제침탈은 평택의 어업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합방’ 직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어업령’을 공포해 기존의 어업권을 부인하고 다시 허가받게 함으로써 어업권이 일본에게 넘어가도록 유도했다. 포승읍 만호리 소재 양식어업장의 어업권을 연암포패조합에게 10년간 허가한다는 내용은 1939년 <조선총독부관보> 1월 4일자에 실려 있다.
평택시의 어가구수는 평택항 개발로 인해 2000년 이후 대폭 감소했다가 이후 점차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어업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3년 9월말 현재 평택지역 어촌계 현황을 살펴보면 평택지역에는 권관리·장수리·신영리·만호리·원정리 등 경기남부수협에 소속된 5개의 해면어촌계가 있으며 해면어촌계원수는 모두 269명이다. 또한 해면어업을 하는 어선은 모두 41척이 등록돼 있다.
평택항은 항계 내 항만개발사업으로 대규모 어업권 보상이 이뤄진 바 있다. 2005년 현재 마을어업 3건을 비롯해 항계 외에 마을어업 8건과 양식어업 1건이 허가돼 어업활동을 하고 있다. 꽃게가 풍년인 올해 평택항 근해에서는 아직도 꽃게잡이가 성행하고 있으며, 정부와 평택시가 소형 어선을 정박 할 수 있는 정박시설을 현덕면 권관리에 계획하고 있어 옛날 화려했던 평택의 어업이 부활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 평택항 앞바다 꽃게잡이(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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