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것 멈추니 비로소 원하는 삶 보여”

암 수술 일주일 후 미용장 시험 봐 합격
병은 힘든 일을 쉬라는 ‘하나님의 뜻’

 
심리학자 칼 융은 ‘우울은 신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라고 했다. 그 말의 뜻은 혼자 있는 시간이라야 자신의 내면을 가장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된다는 말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을 조금만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인다면 어쩌면 우리의 삶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을까.

암수술 후 도전해 획득한 ‘미용장’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자마자 병원에서 바로 수술에 들어갔어요. 평소 건강관리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암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참 어이가 없더라구요. 내가 쓰러지면 가족이 모두 쓰러지는 건데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죠. 그런데 재검사를 해보니 수술을 받지 않은 쪽이 유방암 3기로 전이까지 돼버린 더 심각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그쪽도 마저 수술을 했죠”
평택동에서 리안헤어 평택점을 운영하고 있는 최정민(43) 원장은 당시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를 회상하며 말문을 연다. 암이라는 진단은 그녀에게 있어 청천 벽력같은 소리였고 무엇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지만 그보다 그녀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그동안 7전 8기를 감내해가며 어렵게 준비해왔던 ‘미용장’ 시험이 수술하는 날로부터 8일 후라는 사실이었다.
“1차 수술을 8월 30일 날 했는데 시험이 9월 8일이었으니까 몸도 제대로 못 추스르고 실기시험을 보러갔어요. 집에서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말렸지만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할 것 같았고 그게 두고두고 한이 될 것 같았어요. 힘들게 준비한 시험인데 암 때문에 무너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현재 대한미용사회 평택시지부장을 맡고 있는 최정민 원장은 수술한 지 얼마 안 되는 몸을 이끌고 힘겹게 시험을 본 뒤 1차 항암치료를 받는 날 비로소 합격소식을 들었다고 말한다. ‘미용장’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시행하는 국가기술자격증으로 미용장 자격을 취득하는 것은 미용계 최고 영예의 자리이며 기능계의 박사학위와 동등한 위치다. 전국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미용장 자격증을 갖추고 있어서 그녀에겐 더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가족이 모두 미용인 ‘우리는 하나’
“합격 소식을 듣고 나니까 꼭 날아갈 것 같았어요. 최고의 영광인 미용장 자격증은 항암 치료 후에 발생하기도 한다는 신체 부작용까지도 모두 가져간 것 같았죠. 항암치료 받고 나서 아직까지 특별한 고통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그 말이 맞을 거예요.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죠. ‘여보, 나 이제 다 나은 거 같아’ 하구요”
최정민 원장은 당시의 기쁨을 회상하듯 환하게 웃는다. 그 얼굴은 병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느낄 수 없을 만큼 눈부시다. 가르치는 게 좋다는 그녀는 매장에 있는 직원들도 바르게 가르쳐 제 몫을 해낼 때 가장 보람을 느끼곤 한다고 말한다.
“저희 가족은 다 미용을 해요. 남편은 현재 평택역 쪽에서 두피관리센터를 하고 있고 아들도 군대 제대하고 미용을 배우겠다고 해서 현재 공부 중이죠. 딸은 얼마 전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할 만큼 미용부문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고 있는데 오송세계뷰티박람회에서는 보건복지부 장관상도 받았어요. 고등학생인 막내딸도 미용 쪽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가족이 전부 미용 쪽에서 일을 하니 우린 모두 한마음인 거죠”
항상 공부를 놓지 않고 1년 365일 쉴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그녀에게 세 명의 아이들과 재혼한 남편은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다.
최정민 원장은 자신을 위해 헌신해주는 따뜻한 남편과 바르게 자라준 아이들이 눈물겹게 고맙다.

가족과의 시간 자주 갖는게 소망
“아프고 나니까 지금은 매일 오후 5시나 6시면 집에 들어가게 돼요. 그동안은 절대 생각도 못했던 일이죠. 매장에만 나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욕심에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했거든요. 지금은 일찍 들어가서 식구들과 맛있는 밥도 해먹고 하고 싶은 일들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지내요. 그동안 늘 꿈꿔왔던 삶이죠. 병이 낫기만 하면 이렇게 계속 꿈꾸던 삶을 살 거예요”
최정민 원장의 현재 가장 큰 소망은 가족들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있는 것이다. 더 자주 얼굴보고, 더 자주 웃어주고, 더 자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그것이 그녀의 소박하지만 절박한 소망이다. 항암 치료의 후유증으로 이제 얼마 후면 머리카락이 빠질 테지만 이미 가발도 맞춰 놓았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그녀는 아프고 난 뒤 깨달은 생의 의미가 누구보다도 귀하고 값지다며 또 한 번 환하게 웃는다.
“언젠가 딸이 산책하면서 그러더라구요. 엄마한테 병이 생긴 건 엄마가 너무 힘들게 일해서 조금 쉬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예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아마 전처럼 일하면서 살았으면 예순도 못살았을 테니까요. 좋은 인연들과 함께 좋은 추억 많이 만들면서 사는 게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거 이젠 알아요”
평생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온 그녀지만 현재 그녀가 갖는 긍정적인 사고는 이전과는 조금 다르다. 어쩌면 극한의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내면의 이야기에 깊이 귀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이제 누구보다도 잘 준비돼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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