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사람들이 가꿔온 고향 ‘사업소’

“어르신들의 응원, 어려움 이기는 힘”
“지독한 가난 끝에 몸에 밴 근검절약”

 
“모든 일들이 그렇지만 이장일이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보람이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무척 힘들고 애로점이 많습니다. 100% 완벽할 수는 없는 일이니 비난을 두려워한다면 하지 못하는 것이 이장입니다”
2011년부터 이장일을 시작해 이제 3년차가 된 서탄면 마두2리 김진수 이장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다. 남들은 현장에서 손을 떼고 편히 쉴 나이인 60대 중반에 이르러 이장을 시작했지만 시작하자마자 서탄면이장협의회 총무를 맡아 살림살이를 책임지게 된 것도 그의 세심함과 치밀함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너무 뻔 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봉사정신을 가지지 않으면 제대로 하기 힘든 것이 이장일이 아닌가 합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많아지다 보니 이장이 마을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이 많이 축소됐죠. 하지만 일 자체는 줄지 않았고 어르신들이 많다 보니 챙겨드리고 보살펴드려야 할 책임은 더 커졌습니다”
60대는 노인정을 출입하기가 쑥스러울 정도로 고령화가 많이 진행됐지만 농촌지역에는 어르신들의 경험과 생활의 지혜에 의지하는 일들이 적지 않다. 때문에 김지수 이장의 가장 큰 과제는 어르신들을 봉양하는 일이다.
“제가 이장이긴 하지만 역시 마을의 최고 기둥은 노인회에 속해 있는 어르신들이라고 봅니다. 뒤에서 지지하고 지원해주시는 말씀 한마디면 천군만마나 다름없죠. 추석을 맞아 마을 청소를 하는데 20여분의 어르신들이 빗자루를 들고 동참했습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가는 법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사례 아닐까요?”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피란민의 삶

마두1리는 6·25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피란민들이 모여 세운 마을이다. 가까이는 수복지구인 연천에서 멀리는 황해도 등 공산정권의 박해를 피해 내려온 피란민 125세대가 말과 소를 먹이던 허허벌판이던 이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2만 평의 황량한 토지에 빈 몸으로 내려와 가진 것 하나 없던 피란민들은 정부가 준 조악한 자재만으로 움막을 지어 지친 몸을 누이고 부족한 구호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한국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는데 구호품이라는 것이 죄다 미군물품이었어요. 당시는 듣도 보도 못했던 치즈니 버터니 그런 것들…, 정말 배가 많이 고팠죠. 거기다 땅은 왜 그리 질척거렸는지. 어느 날 옆집에서 기르던 닭이 울타리를 빠져나가 소동이 일었는데 멀리가지도 못하고 금방 잡혔더라고요. 알고 보니 진흙에 닭이 다리가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된 거였죠”
마을 노인회 김현택 회장이 기억하는 초창기 마두2리 모습은 난민촌과 다름없는 척박한 곳이었지만 그런 열악한 환경을 피란민들은 지독한 근검절약으로 이겨나갔다.
“지금이야 굶지는 않고 그럭저럭 살만하지만 당시는 굶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마을 사람들은 바가지를 들고 이웃 마을로 구걸 아닌 구걸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들 지독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아끼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오죽하면 인근에서 돈이 들어가면 나올 줄 모르는 곳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으니까요”
마두2리는 1963년 정식으로 행정구역에 편입되기 전까지 ‘사업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말이 좋아 사업소지 실제로는 피란민 수용소와 다름없을 정도로 지원도 적고 환경도 열악했다.
한 겨울이면 난방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산림복구에 여념이 없었던 정부 시책에 따라 함부로 벌목을 할 수도 없었지만 얼음장 같은 방에서 겨울을 날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처벌을 무릅쓰고 땔감 구하기에 나서기도 했다.
“서탄면은 인근에 커다란 산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땔감 구하는 것이 겨울철 마다 전쟁 같았죠. 불법인줄 알면서도 추위를 피하자면 어쩔 수 없이 밤에 몰래 야산에 올라가 솔가지를 잘라오곤 했는데 단속반이 수시로 출동해 잡히면 경찰지서로 잡혀가 혼쭐이 나곤 했습니다”

가난, 후세에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가진 몸뚱이 하나뿐이었고 믿을 곳이라곤 타향살이 설움을 함께 한 동료 피란민들 밖에 없었던 ‘사업소’ 사람들은 지독했던 가난을 후세에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먹고 살기도 힘든 환경에서도 교육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었지만 이젠 여기가 고향이죠. 피란 1세대는 거의 돌아가셨고 저희같이 2세대로 이젠 나이가 들어 두고 온 고향에 대한 향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다만 새로운 고향인 이곳에서 자식들이 잘 살기 바라는 마음에 가르치는 것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작은 마을이지만 판검사도 있고 공무원도 많은 편입니다”
담담히 옛 고향을 이야기하며 애써 그리움을 감추려 하지만 마을 어르신들의 눈가에 고향을 향한 수십 년간 기다림의 고통이 담겨 있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어르신들을 위해 회관의 시설개선이 이뤄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마을 회관이 좁아 곁에 정자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땅을 살 자금을 구할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버스정류장도 좀 가까이 이전해줄 수는 없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욕심을 부리자면 끝이 없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 하지만 “조금 부족한 것은 채워가는 기쁨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다”며 미소 짓는 김진수 이장의 얼굴에는 나이 잊은 열정과 굳은 의지가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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