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하는 무명시인, 환갑에 낸 ‘첫 시집’

경비일 하며 새벽마다 엮은 삶의 성찰이 나의 詩
‘시’로 다 말하지 못한 재능, 음악적 ‘끼’로 표출

 
“폐교된 학교 교실 같은 을씨년스런 거실에서/ 육십 늙은이와 세 살짜리 백순이란 똥개가 논다/ (중략) / 개와 동무되어 나도 개가 되어 짖는다/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멍멍대며 논다

땅바닥에 시 쓴 젊은 무명시인
“20대 초반에 머슴의 딸을 흠모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자가 서울로 이사를 가고 난 뒤 그 여자가 신던 신발을 잡고 울고, 보리밭 매다가도 울고, 땅 바닥에 그 여자의 이름을 쓰면서 시 비슷한 것을 썼던 것이 아마도 내가 ‘시’라는 것을 쓴 처음이 아닐까 싶어요”
현덕면 인광리가 고향인 민병철(66) 시인은 평생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건물 경비 일을 하다가 현재 만도기계 사원아파트에서 청소를 하며 생계를 잇고 있는 민병철 시인은 지난 2007년 자신의 첫 시집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출간해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환갑 기념으로 출간한 그의 시집에는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과 삶의 성찰이 고스란히 투영된 40여 편의 시들이 실려 있다.
“경비 일을 할 때 시를 많이 썼어요. 밤에 몇 번씩 순찰을 돌아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거든요. 시어도 부족하고 표현력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꼭 시집 한 권은 내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제가 시집을 낸다니까 한 지인이 제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하며 웃더라구요. 그 말이 시집 제목이 됐죠”
민병철 시인은 당시 시집을 700~800부 찍었는데 돈을 받고 시집을 준 것은 현덕면사무소 직원이 시집을 받으며 건넨 5000원이 전부였다며 큰 소리로 웃는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시이지만 그래도 어떤 이는 시가 좋다며 성경 읽듯 읽는다는 독자도 있다고 슬쩍 귀뜸을 한다.

삶의 고통으로 시적 성찰 이뤄내
“40대 후반에 안중에서 하던 철물점 운영이 힘들어지자 일본으로 막노동을 떠났어요. 그곳에서 인종차별을 받고 무리한 일로 건강까지 안 좋아지는 걸 느끼면서 1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죠. 와보니 살던 집은 빚으로 넘어가고 3살·6살·9살 된 제 아이들이 철물점 바닥에 누워 자고 있더라구요. 그때 참 많이 울었죠. 아마 제 우울증이 시작되는 초기였을 거예요”
민병철 시인은 50대 초반에 본격적인 우울증이 찾아와 8년 동안이나 방안에서 밖엘 나오지 못했다는 말을 들려준다. 아내가 남편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 전축도 사다줬지만 결국 전축 비닐도 못 뜯어냈다며 말문을 멈춘다.
“8년 만에 저를 밖으로 끌어낸 건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그토록 싫어하던 형님의 죽음이었어요. 장지에 가지도 못하고 방안에서 죽은 형을 추모하며 망자를 위한 기도문을 외우고 있는데 갑자기 글자가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형의 장례차량은 막 집 앞 도로를 지나가고 급한 마음에 거의 기다시피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장지까지 가서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어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다음날부터 밖으로 나오게 됐죠”
민병철 시인은 지난겨울 경비 일을 하다가 몸에 마비가 와서 119에 실려 가기도 했다. 온 몸이 마비됐다 생각했는데 다니던 성당 수녀님의 조언에 따라 펜으로 성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비가 풀리기 시작했다. 역경을 이겨내고 다시 세상과 화해하게 된 민병철 시인은 8년 동안 못했던 것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글쓰기와 음악 등 많은 예술적 끼들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시와 음악은 ‘하나’ 재능 펼쳐
“평소 텔레비전은 잘 안 봐요. 음악을 좋아하는데 듣는 건 클래식이고 부르는 건 주로 대중가요죠. 슬픔을 알고 절망을 아는 사람들은 베토벤의 ‘비창’을 들으면 아마 많은 공감이 될 거라 생각해요. 장날이면 어르신들에게 국수봉사를 하는 충효단이라는 봉사단체에서 연예담당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데 어른들 국수 맛있게 드시라고 그 앞에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곤 해요”
민병철 시인은 전국노래자랑에도 벌써 몇 번째 출연했는데 번번이 떨어지기만 했다며 큰소리로 웃는다. 그러나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은 언제나 행복하고 즐겁다. 여유가 생기면 차에 악기를 싣고 돌아다니면서 오지나 관광지에 가서 노래하며 살고 싶다는 것이 민병철 시인의 바람이다.
“나이 들수록 타인의 시선은 그리 개의치 않게 돼요. 그저 노인들 앞에서는 노인이 원하는 몸짓과 노래를 들려주고, 젊은이들 앞에선 또 그들이 원하는 별난 짓들을 보여줄 뿐이죠. 그런다고 내가 변하는 것도 아닌데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남들은 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근무하는 아파트에 사는 어린 정신지체 친구에게 스마트폰 기능을 배우며 알게 됐죠. 장애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모르는 게 장애고, 마음이 병든 게 더 큰 장애라는 것을요. 시인의 마음으로 보면 모두 안쓰럽고 친구도 될 수 있거든요”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삶을 소풍처럼 살다 갔으면 좋겠다는 민병철 시인, 붉은 노을을 보면 삶의 용기를 되찾곤 한다는 민병철 시인은 시를 쓰든 노래를 하든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는 활활 타오르다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간절한 꿈을 전하며 잠시 허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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