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 아름다운 기억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자고 일어나면 차고넘치는 정보 탓에 무엇 하나라도 오랫동안 붙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는 일도 잠시 잠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가는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실질적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흥밋거리로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끌벅적 관심을 갖다가 또 다른 소식에 눈을 돌리는 것으로 그치고 말지만 피해를 입는 당사자들의 고충은 두고두고 고통으로 연결됩니다. 바로 이 시간 대형마트 평택입점을 앞두고 반대투쟁을 벌이는 평택 통복시장 상인들 고통이 그렇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평택에 밀고 들어오는 대형마트 문제는 통복시장 상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 같지만 결국은 평택시민 모두가 피해를 입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입니다. 왜냐하면 통복시장 상인들 경제가 좋아야 다른 업종 경제와도 연결이 되어져 평택의 전반적인 경제가 활성화 되어지는 유기적 관계로 현대 시장경제가 움직이는 탓입니다.
그러기에 대형마트의 평택진출은 결국 평택경제를 근본부터 흔들어놓게 되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통복시장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을 것이고 대형마트의 독과점에 의한 경제 불균형은 결과적으로 재벌들만 배가 불렀지 그 모든 피해는 평택시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일이기에 시민들이 힘을 합쳐서 대형마트의 평택진출을 반드시 막아내야 할 것입니다.
생산이란 필요한 사람이 있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물건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시장은 형성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시장이 처음에는 열흘에 한 번이나  일주일에 한 번…
그 고장 상황에 따라 제멋대로 열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과 같이 전국 어디서나 5일장으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5일장 한 귀퉁이에는 대장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낫이나 칼도 벼르고 호미나 괭이·곡괭이·보삽 등 농기구들을 팔거나 수리를 해주었습니다. 대장간은 그래서 다른 장꾼들 보다 더 일찍 시장에 나와서는 콕스에 불을 댕겨 풍구질을 하며 불을 피워야 쇠를 달구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절 사방 100리 안에서는 대장간을 찾을 수가 없어 간단한 농기구를 손질하려고 수소문해서 버스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고 대장간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건너온 싸구려 농기구들이 판을 치는 탓에 그나마 남아있던 대장간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고 있습니다.
5일장에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남들 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사람들은 동이 트기도 전에 물건을 이고 지고 걸어서 걸어서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더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 남들보다 먼저 장을 찾았습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사시사철 볕이 바른 재랭이고개에는 원곡이나 청룡말 등지에서 집에서 기른 채소나 또 농사지은 쌀이나 보리 한 두 말 그리고 콩이나 고추 등속을 팔기 위해 나온 할머니들이 한 두 사람 보이기 시작했는데 시골에서 농사로 거둔 것이라 시장에서 파는 물건보다는 싱싱하기도 하거니와 또 인심도 후해서 한 두 사람씩 반찬거리를 사러 모이다 보니 얼마가 지나지 않아 작지 않은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집안에서 기른 채소나 곡식과 함께 따듯한 인심을 덤으로 얹어주는 넉넉함이 넘쳐나는 시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지 인간의 욕심은 모든 불신不信의 씨앗이 되고 종당에가서는 서로 간에 재앙이 되고 맙니. 그러니까 우리가 사과를 한 상자 사서 열어보면 윗줄에 놓인 사과는 눈가림으로 모두 크기가 그만그만하지만 아랫줄에 놓인 사과는 알이 작은 것은 둘째 치고 상한 것이나 흠집이 심해서 상품이 될 수 없는 것들이 들어있던 기억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재랭이고개에는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시골에서 온 할머니들이 가지고 나오는 것은 집에서 농사를 지은 것이 아니라 도매시장에서 떼 가지고 온 물건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차츰 값도 비싸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사람들 발걸음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5일장 시장에서 먹을거리는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지금이야 누구라도 차를 가지고 다니는 시절인지라 물건을 파는 사람이나 물건을 사는 사람 모두가 다 짧은 시간에 이동이 가능하지만 그 시절에는 버스가 오직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기에 일단 장에 가면 끼니를 때우거나 허기를 달래야 했습니다.
팥죽이나 밀가루 칼국수, 여름에는 콩물국수, 인절미 떡,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찐빵 그리고 막걸리. 큰 유리 물 컵에다 됫병소주를 따라서 파는 막소주…
그래서 장을 보러 나왔다가 잔술에 취해서 결국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채 시장바닥에 드러눕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시장이라고는 공중변소가 달랑 하나 그래서 시골에서 온 할머니들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장바닥 한 복판에서도 하수구를 찾아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치마를 펼치고는 당당하게 ‘볼 일’을 보기도 했습니다.
5일마다 서는 장이지만 장사를 잘하면 단골도 많았습니다. 장날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가 다  늘 자기가 앉던 자리를 차지하기 마련이어서 어느 거리에 가면 인심 좋은 장사꾼을 만날 수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일부러 찾아가서라도 필요한 물건을 샀습니다.
세월도 변하고 인심도 변한 세상이라지만 재래시장의 ‘상징-아이콘’은 무엇일까요?
뭐니 뭐니 해도 서로 믿고 의지하는 ‘믿음’과 따듯한 정情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건과 함께 따듯한 정이 오가는 사람 사는 재래시장이 늘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卒,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jaa_yoo(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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