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단둘이지만 ‘맛있게’ 삽니다

아들의 행복한 웃음을 보는 건 나의 행복
내 안의 주인을 찾는 작업은 기술이 필요

 
돈이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의 기준으로 돈에 가장 큰 무게중심을 두는 것은 어쩌면 살아가는 동안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생도 ‘숙련된 기술’이 필요
“욕도 칭찬도 결국은 그 사람을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건 아닌 거 같아요. 코스모스에게는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인데 보는 이에 따라 너무 예쁜 꽃도 됐다가 별것 아닌 흔한 꽃도 됐다가 그러잖아요. 그게 코스모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말예요”
자신은 별것 아닌 사람이라며 한사코 손사래 치는 서규찬(50) 씨는 지난 날 소위 잘 나가는 카피라이터로 십여 년 살았던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림도 그리고 국방일보 삽화도 그리며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로 인정받았던 그가 지금은 평택에서도 한참을 시골로 들어간 곳, 비닐하우스로 얼기설기 지은 집에서 자폐증을 앓는 스물한 살 아들과 단 둘이 산다. 아직도 예전 실력은 녹슬지 않아 집안 곳곳에는 현재 작업 중인 그림들이 눈에 띈다.
“살기 좋다는 지구에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죠. 이렇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잘 포착해 맛있게 살아갈까 늘 연구해요. 아들과 둘이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도 이 따뜻한 날씨 속에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을까 생각했죠”
인터뷰를 하러 찾아간 곳에서 그의 삶의 체험이 녹아있는 인문학 강좌를 듣는다. 그가 들려주는 인문학 강좌는 그가 사람과의 접촉 없이 살아가는 동안 타자들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그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그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죠. 그림을 잘 그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잘 그리려고 노력하는 과정도 필요했고 좌절하는 과정도 수없이 겪었죠. 하지만 결국 깨닫게 된 건 그림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거였어요”
서규찬 씨는 인간의 내면에는 수많은 ‘나’가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나’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 될 뿐, 결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잘 그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운전이 기술인 것처럼 삶도 기술이 필요하죠. 그런데 그런 삶의 기술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큰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욕심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죠. 필요한 때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욕심이 욕심의 자리에 있지 않으면 불행해져요. 칼은 사람에게 꼭 필요하지만 강도에게 쓰이면 사람의 목숨을 해하는 도구로 쓰이듯이 말예요. 칼도 칼의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 법이죠”
서규찬 씨는 사람들은 괴로움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 하지만 결국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자신 안에 있다고 말한다. 30대 중반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한번도 행복하지 않았다는 그는 남들 눈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보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과거를 인정하며 현재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비밀처럼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에게 주고픈 건 ‘맛있는 인생’
“지금 당장은 벌이가 없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안 쓰고 살아요. 현재가 맛있고 즐거운 이유는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잘났건 못났건 미래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니까요. 내 삶에 대해 말할 순 있지만 내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할 수 없잖아요. 현재를 살아간다는 건 설렘 그 자체예요.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는 거죠”
성균관대 교수로 책을 누구보다도 많이 읽던 학자였다는 서규찬 씨의 아버지는 그에게 입버릇처럼 ‘책에는 길이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말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막내아들과 아내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미련 없이 과거의 자신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자폐증 아들과 함께 하는 삶을 택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인생을 즐겁고 맛있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아이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까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는 기쁨을 가르치려면 적게 먹고 적당히 운동해야 한다는 걸 내가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죠. 아이는 저의 행동을 보고 자기만의 맛있고 즐거운 인생을 조금씩 알아가겠죠.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은 자식이 행복한 것을 보는 거니까 아이를 위해 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제 자신을 위한 거예요”
연탄난로가 놓인 비닐하우스에서 그와 두 시간 넘게 인터뷰하고 돌아선 오후, 마을을 빠져나오는 순간 또다시 그의 사람 좋게 보이는 웃음이 그리워진다. 가난하지만 누구보다도 풍요롭게 맛있는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나와 같은 시대, 바로 그곳에 풍경처럼 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척박했던 내 삶이 문득 풍요로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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