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불확실한 미래를 설계하는 전문영역”

법대 졸업 후 교보생명 입사, 24년 한 우물
절망의 순간에 선 고객들에게 빛이 되고파

 
절망의 순간에 빠져 삶이 막막해 졌을지라도 여전히 밥을 삼키며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건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혹한 형벌일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런 절망의 순간에도 나를 응원하며 경제적인 도움까지 주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힘든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나 내일을 향해 다시 한 번 전진할 수 있지 않을까.

법대생, 보험회사에 입사하다
“법을 전공했지만 법은 저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졸업 후 여러 곳을 찾던 중 교보생명이 가진 이미지가 제 맘에 들어 입사원서를 제출했죠. 교보생명은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을 기업가 정신으로 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앞으로는 보험 쪽이 전망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올해로 24년째 교보생명에서 일하고 있는 이강훈(51) 지점장은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처음 교보생명 관리직으로 입사하던 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법대를 졸업하고 나름 자신감이 충만했던 그는 입사 후 사소한 잔심부름부터 시작하던 당시 세상 속에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수없이 회사를 그만둘 꿈도 꾸었다며 큰 소리로 웃는다.
“1994년경 지방에 생명보험회사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중앙에 있는 큰 생명보험회사 관리자들이 그쪽으로 많이 스카우트됐죠. 창구여직원들마저 자리를 옮기는 상황이 되자 제가 창구 업무까지 맡아 고객들의 업무처리를 해야 했어요. 물론 제게도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긴 했지만 제가 다른 회사로 옮길 수 없었던 건 입사 당시 면접관들에게 했던 말 때문이었어요. 입사하면 평생 교보생명을 위해 일하겠다고 큰소리 쳤거든요”
모두가 떠난 회사 창구를 지키며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하는 동안 이강훈 지점장은 말단직원 업무까지 훤히 꿰뚫게 됐다. 그리고 승진을 거듭해 40대 초반에 이미 교보생명 본사에서 부장 직함을 갖게 됐다.

10년 후 보험의 진정성 깨달아
“보험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깨닫게 된 건 제 보험경력이 12년차 되었을 때였어요. 당시 외국계 회사가 종신보험이라는 걸 들고 들어와 히트를 치자 그쪽과 관계된 강사를 초빙해 종신보험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죠. 그때 보험에 관한 제 모든 고정관념들이 깨지면서 비로소 고객들의 행복과 미래를 설계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더라구요”
이강훈 지점장은 강의를 듣기 이전까지만 해도 보험은 설계사들에게 청약서 하나씩 쥐어주고 청약을 받아오도록 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고 고백한다. 때문에 보험설계사들은 고객들에게 구걸하다시피 계약해 달라고 사정해야 했고 이런 일들이 지속되면서 보험은 인정에 끌려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곤 했었다고.
“보험은 구걸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보험설계사는 고객의 금융자산을 지키고 불확실한 미래를 안전하게 설계해주는 전문 영역이죠. 이 일을 하면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가까운 사람들을 미처 챙기지 못해 불의의 사고를 당한 후 그분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걸 지켜보는 일이였어요. 능력을 발휘하며 실적을 올리던 한 FP 여성분이 청약서를 다 써놓고 도장만 못 찍은 상태에서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막막해하던 기억도 납니다. 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해 하는 그분을 보는 순간 더 꼼꼼하게 챙기지 못한 제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죠”
이강훈 지점장은 스스로를 ‘보험에 미친 놈’이라고 표현한다. 보험인은 남들이 꺼려하는 ‘죽음’과 ‘불행’에 대해서도 고객과 스스럼없이 대화해야 하는 직업이지만 이강훈 지점장은 만일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며 잠시 침묵한다.

사랑은 어려울 때 힘이 돼 주는 것
“FP 분들을 교육할 때 만일 고객이 보험청약을 거절하면 돌아서기 전 반드시 그 집 앞에서 그분의 행복을 기도하고 오라고 교육합니다. 고객이 보지 못하더라도 진심은 통하는 법이니까요. 진심으로 고객의 행복을 위하는 마음이 없으면 보험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걸 제 스스로 잘 알고 있거든요”
이강훈 지점장은 자신 역시 일하다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을 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한다. 다행히 큰 병은 아니었지만 당시 최악의 순간을 떠올리며 했던 수많은 상상들은 맹목적인 삶의 전진만을 강요하던 자신을 조금은 성숙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가장은 가족을 더 이상 보살필 수 없을 때에도 가족들이 힘들지 않게 지낼 수 있도록 미리 대비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도 증권을 모아 놓은 곳에 미리 작성한 유언장을 함께 보관해서 만일 내가 불시에 가족들 곁을 떠나더라도 가족들이 큰 동요 없이 기존의 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준비하고 있거든요”
젊은이들을 위한 락페스티벌이 열리면 가장 나이가 많은 입장객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면서도 중학생 아들과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래 부른다는 이강훈 지점장, 아이들에게 공부보다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더 많이 들려준다는 그는 자신 역시 가족에 대한 철저한 대 비로 가족을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이라며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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