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놀 수 있는 공간 내손으로 꾸몄죠”

태어나고 자란 집,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신
‘루트’에 모여 각자 새로운 길을 개척했으면


 
살아가면서 누구나 ‘꿈꾸는 삶’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술인이 꿈꾸는 삶이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이들과 밤새 예술을 논하고, 새로움을 발견하며, 그 힘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창작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아닐까.  나이 들어서도 예술인들이 허물없이 어울리고, 각자의 예술세계를 향해 쉼없이 정진할 수 있는 곳이 ‘루트(route)’에서 실현됐다.

100년 된 고향집 내 손으로 꾸며
“여기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에요. 결혼해서까지 살았으니까 어린 시절과 청년기 전부가 이곳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100년도 훨씬 더 된 낡은 집이라 처음에는 전부 허물고 원룸을 지으려고 했었는데 문득 낮은 서까래가 눈에 들어오면서 이 공간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건축과 디자인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어떤 곳을 어떻게 살려야 할지 참 많이 고민했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평택지부에서 사무국장과 사진분과장을 맡고 있는 최승호(53) 사진작가는 지역 예술인들이 모여 소통하고 창작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꾸기 시작한 건 벌써 오래전 일이라고 말한다. 먹고사는 일에 신경 쓰느라, IMF를 온몸으로 견뎌내느라, 바쁜 일상에 적응하느라 내면 깊숙이 감춰두었던 ‘나이 들어서도 잘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오래전 꿈이 자신의 옛집에서 펼쳐질 거라고는 그 역시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다.
“형제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낡은 집을 왜 리모델링하느냐고 만류했지만 이 공간이 완성된 후 가장 좋아했던 사람들은 바로 어린시절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게 된 형제들이었고 우리가 자라온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마을 어르신들이었어요. 공사가 완공된 후 누나·동생과 이곳에 모여 밤새 옛날이야기 나누며 정말 행복했습니다”
최승호 작가는 현재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는 방을 가리키며 그 안에 스며있는 추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 혼자 있을 때도 외롭기는커녕 잊고 있었던 추억들이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미소 짓게 된다는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허물없이 이 공간을 찾아줄 지역의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생각하면 더없이 행복해진다며 활짝웃는다.

사진에 철학·예술 접목, 꿈 키워
“사진은 대학 때부터 시작했지만 가난했기에 꿈으로만 간직하고 접어두어야 했습니다. 결혼한 후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됐고 생활을 위해 자동차 영업을 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엔 늘 허전함이 있었죠. 그때마다 산에 오르는 것으로 대체하곤 했는데 어느 날 철학가 들뢰즈의 책에서 ‘좋아하지만 거기서 그치는 건 아무 소용없다’는 구절을 읽은 뒤 불현 듯 더 늦기 전에 내가 꿈꾸던 것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을 다시 시작했죠”
최승호 작가는 그때부터 중앙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사진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장소와 사람을 불문하고 어디든 찾아다녔다. 사진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철학책을 읽고 시를 읽고 인문학을 공부했다. 사진에 관한 지식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곳에 정신을 담지 않으면 결국 절름발이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고 사진자료를 구하기 위해 외국에도 많이 나갔어요. 그런데 갈 때마다 외국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공간에서 예술인들이 함께 소통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 거예요. 우리나라는 인사동에 그런 공간들이 조금씩 만들어지고는 있지만 지역에서는 아직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니까요. 그때부터 꿈꾸었던 것 같아요. 예술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작은 공동체 말예요”
우리 민족이 오래 간직해 온 공동체 문화를 살리는 것은 예술인들의 몫이며 문화예술의 자생력이 가진 힘이라고 말하는 최승호 작가는 결국 자신이 살던 고향집을 직접 설계하고 꾸미기 시작했다. 그렇게 손을 대기 시작한 고향집은 잠자던 작은 방은 전시공간으로, 낮은 서까래가 있고 햇살 잘 드는 마당은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기둥 벽면을 살린 공간은 책들을 전시한 작은 도서관으로 재탄생했다.

문화예술이 만나는 통로 ‘route’
“이 공간은 누구나 찾아와 ‘나는 무엇인가’라는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해요. 그 화두는 지역의 청소년들에게도 이어졌으면 좋겠구요. 아이들이 찾아와 인문학을 배우고, 예술을 느끼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나위 없겠죠. 옆쪽에 남은 30여 평의 공간은 창고로 개조해 지역에서 활동하는 실험예술가나 연극·음악 등을 하는 공간으로 만들 생각이에요”
최승호 작가는 이곳이 예술인의 작품을 무료로 전시도 해주고, 아이들이 찾아와 재잘재잘 이야기 나누고, 언제나 문을 열어놓는 편안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알록달록한 담벼락 그림을 보고 어린이집을 짓느냐고 묻던 동네 어르신들도 이제는 이 공간으로 인해 동네가 환해졌다며 “아이고, 우리 승호~”하며 반갑게 맞아주신다고.
“‘예술은 삶을 비루하게 하고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라던 들뢰즈의 말에 공감해요. 그게 바로 예술이 가진 힘이라고 믿거든요. 수익성 없는 일을 한다고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같이 미친 사람도 있어야 인생이 재미있는 거 아니겠어요?”
예술을 꿈꾸고 그곳에서 파생되는 삶의 아름다움에 고개 끄덕이는 최승호 작가, 그와 ‘루트’ 마당 한 가운데서 이야기 나누는 동안 문득 세상 속을 헤매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파랑새를 찾았을 때의 얼굴이 바로 이 얼굴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 햇살이 등으로 내려오던 그 공간을 떠올리는 이 순간, 나 역시 파랑새를 만져본 듯 문득…, 행복해진다.
임 봄 기자
foxan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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