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 나무에 존재의 지문 새기는 일”

서각에 미친 삶, 좋아하니 행복할 수 있어
작품 깊이를 알아갈수록 두려움도 깊어져

 
현대 독일의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에서 삶의 목표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존재가 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존재’ 하는 사람은 어떤 것을 소유하기 위해 갈망하지 않으며, 생을 즐기고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사람이 아닐까.

‘미쳐야 미친다’는 예술가의 삶
“젊어서 서각을 배울 때까지는 거의 미쳐서 살았던 세월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서각에 미쳐있는 건 사실이죠. 고등학교 2학년 때 강화도 전등사에 놀러갔다가 팔만대장경을 보는 순간 그만 정신이 아득해져 기절을 했었는데 그땐 내가 왜 그랬는지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그걸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이규남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0호 서각장 기능보유자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공무원이 되었다. 그러나 서각에 대한 열정을 누르지 못해 목공예 학원도 다녀보고 혼자 문패를 새기기도 하고 야자 껍데기에 그림이나 글씨도 새기며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1981년 여주군에 재직하던 당시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의 작품을 보고는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여주에서 서울까지 네 번이나 찾아가 가까스로 허락을 받았다.
“당시 서각을 배울 때는 월급의 몇 배가 들어갔어요. 그래도 서각을 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밥 한 끼 덜먹고 코피가 터져가면서도 여주에서 서울까지 왔다 갔다 했죠. 그때는 오로지 서각만 생각하는 바람에 거의 미쳐있었거든요. 돈이 없어 아이들 유치원도 못 보내고 생활비도 없어서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죠”
그는 서각을 배운다는 기쁨으로 그렇게 3년을 버텼다. 돈이 없어도 좋았고 몸이 망가져도 좋았다. 한문학자 정민 선생이 펴낸 ‘미쳐야 미친다’는 책 제목처럼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열정을 가지고 노력해야만 제대로 자신의 세계를 우뚝 세울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체득한 시간이었다.

나무에 자신의 존재를 새기다.
“서각은 주로 오래 된 느티나무나 돌배나무·대추나무처럼 견고하면서 결이 좋은 나무를 사용해요. 현대적인 것보다는 와당문이나 고분벽화의 전통적인 문양에 현대적인 것을 가미해서 작품을 만들죠.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해요”
이규남 서각장은 2년 전에 42장으로 구성된 ‘천로역정’을 작업했다. 17세기 영국 작가 존 번연의 작품인 ‘천로역정’은 그리스도인이 멸망을 앞둔 장망성을 떠나 하늘나라를 향해 여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는 채색의 어려움으로 인해 완성하지 못하고 있지만 심혈을 기울여 해온 작품인 만큼 직접 민화를 배우며 채색 응용하는 방법을 공부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점점 작품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요. 더 좋은 방법은 없나 고민하게 되고, 이게 과연 최선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 심적 부담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직접 채색을 하기위해서 민화를 배우는데 늦은 나이지만 배우는 즐거움이 상당히 커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힘들지는 않아요”
이규남 서각장은 직접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몸에 밴 서각장의 피로 평생 한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공무원으로 있을 때도 진급을 하게 되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진급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쟁이’
“벌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으로 생계를 이을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기에 업으로 하겠다고 찾아오는 제자를 여럿 돌려보내기도 했어요. 다행히 딸이 고등학교 때부터 바쁜 일 있을 때 아르바이트처럼 잠깐씩 일을 시키면 곧잘 수월하게 해내더니 지금은 꽤 잘 하는 편이에요. 지금은 결혼 후 아이들을 돌보느라 많은 시간을 내진 못하지만요”
그는 지금도 새벽 4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작업실에 내려와 밤 10시까지 작업에 매달린다. 때론 자다가도 일어나 일을 시작할 때도 있다. 일에만 몰두하다보니 어느새 친구도 친척도 멀어졌지만 그래도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다. 30년을 해도 돈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건 딱 하나 ‘좋아했기 때문’ 이다.
“요즘은 옛날 책의 겉장에 마름의 꽃무늬를 찍어 낼 때 쓰는 목판인 ‘능화판’ 복원을 하고 있어요. 전부 다 복원하면 100여 장 정도 되는데 박물관에서도 소장된 자료집을 잘 주려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죠. 시나 편지를 쓰는 종이에 장식용 무늬를 찍어 넣기 위해 만드는 ‘시전지판’도 하고 싶은데 자료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는 자신이 터득한 실존적 체험을 하나하나 나무에 새김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서각 해낸다. 진정한 예술가를 찾기 어려운 요즘, 무엇인가를 더 많이 소유하기 보다는 존재를 정립하기위해 애쓰고 그로부터 즐거움을 얻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행복하다. “아는 자가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가 즐기는 자만 못하다”는 공자의 말처럼 이미 즐기는 자의 반열에 들어선 듯 한 그 열정이 새삼 눈물겹도록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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