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명장, “55년 양복과 함께 했죠”

 

맞춤양복업계 대부, 옷은 사람과 교감
후학 양성에 온힘, 평생 직업으로 적합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평생을 함께 하는 일만큼 행복한 삶이 또 있을까. 특히 그 직업이 남들이 쉽게 가져가지 못하는 자신만의 기술로 비롯된 것이라면 아마 더욱 특별한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으리라.

18세, 양복점 재단사로 첫 발
“양복입고 넥타이 매고 다니는 사람들이 참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열여덟 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양복점에 취직했죠. 그때는 기술만 가르쳐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제가 손이 빠르고 재주가 있었던지 석 달이 되니까 주인이 기술도 가르쳐주고 밥까지 먹여 주더라구요. 고향에서 기술배운지 3년 만에 더 큰 곳에서 배우고 싶어 서울로 올라왔죠”
국제대학교 평생교육원 ‘명품양복제작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문병지(72) 교수는 언제 처음 양복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옛 일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는다. 전북 고창이 고향이라는 문병지 교수는 정읍과 고창에서 양복기술을 배운 뒤 5·16혁명이 일어난 해인 1961년 서울에 있는 ‘대한복장학원’에서 남성복 재단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서울로 올라가 다른 사람들보다 한 달이나 늦게 과정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3개월 뒤 졸업할 때는 1등으로 졸업했어요. 덕분에 바로 개인 양복점에 취직을 하게 됐는데 추석을 앞둔 때라서 밤을 새워가며 일했죠. 남들은 저고리 하나를 만드는데 15시간 정도 걸렸지만 전 10시간이면 끝내니까 주인들이 참 좋아했어요. 시골 촌놈이 서울에서 재단사가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거죠”
문병지 교수는 양복점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22살 때 벌써 보조를 두고 일했다고 말한다. 변두리 지역에서 자신감을 얻은 문병지 교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명동으로 진출했고 서울로 올라온 지 10년 만에 명동 중심에 양복점을 내고 사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1992년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
제 실력을 보고 찾아오는 고객이 점점 늘어났는데 한번 인연을 맺으면 절대 끊어지지 않으니 자연히 월급도 올라갈 수밖에 없었죠. 제가 고객들을 대할 때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진정성이에요. 고객을 돈을 벌어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친구로 생각했거든요”
문병지 교수의 이런 생각은 위치가 좋지 않다는 빌딩 4층에 양복점을 냈을 때도 여전히 자신을 찾아주던 손님들의 수로 입증됐다. 그리고 점차 사업이 번성해 1985년 롯데호텔 안에 매장을 내 10여년을 운영하기에 이르렀고 1986년에는 약수동에 ‘복장문화회관’을 건립하는데 큰 역할을도 했다. 문병지 교수는 1992년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됐으며 1998년에는 명장들의 모임인 ‘대한민국명장회’ 회장을 맡아 명장들의 작품을 상설전시판매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99년 미국으로 건너가 선진 테일러문화를 체험했어요. 우리나라는 국제기능올림픽에서 12연패를 할 정도로 양복기술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장인이라면 그곳에서도 귀하게 대접하고 신뢰를 하거든요. 미국은 전문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더 존경하고 우대하는 풍토를 갖고 있으니까요”
문병지 교수는 12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하고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와 이천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코리아테일러아카데미’를 세워 후학들을 양성하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 테일러 기술자들을 취업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남은 과제는 후학 양성
“독일의 초등학교 교사는 아이가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계속 담임을 맡으면서 아이의 성향을 파악한대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이면 그 아이에게 맞는 진로지도를 한다고 하더라구요. 부모들도 교사의 진로지도를 존중하구요. 우리나라도 대학진학뿐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필요해요. 세상에 직업들이 많긴 하지만 그중 양복 테일러는 나이 들어서도 평생 할 수 있는 분야라 할 수 있죠”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 현대 웨딩의상으로 신랑이 입는 모닝코트와 턱시도가 소장돼 있는 테일러 명장 문병지 교수는 올해부터 국제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1대 1 도제식 수업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곳에서 3개월씩 9개월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국내는 물론 해외 취업까지 알선해주는 과정이다.
“젊은 인재들에게 테일러 기술을 가르쳐서 국제 사회에 진출시키면 내재된 손기술에다 국제적 감각이 발휘돼 생업은 물론이고 사회 구성원으로서도 탁월한 지위를 차지할 것이라 생각해요. 제자들을 키우는 건 제 남은 과제라 할 수 있죠”
평생을 양복 만드는 일과 함께 해온 문병지 교수, 고객과의 신뢰를 쌓는 일과 양복 만드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했다는 문병지 교수는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의상디자이너는 ‘제2의 조물주’라고 말하며 평생을 함께 해온 양복제작 명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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