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항상 배우는 자세로 살았죠”

 

다산 정약용 가르침 가장 마음에 와 닿아
배우면 매일 새로운 날, 노력하며 살아야

 

 
나이 때문에 배움이 망설여진다는 진나라 임금 평공의 말에 신하 사광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젊어서의 배움은 막 떠오르는 태양과 같아 전도가 무궁하고, 중년의 배움은 뜨거운 태양이 하늘에 뜬 것 같아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노년의 배움은 석양과 같아 빛이 미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두운 길을 더듬거리며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데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입대해 3주 동안 배운 영어
“고등학교 졸업 후 공무원으로 잠시 근무하다 입대했는데 논산훈련소에서 바로 카투사에 차출 돼 팽성읍 안정리 부대로 오게 됐어요. 그때는 무작위로 보내곤 했거든요. 처음 들어갈 땐 영어 한마디도 못했었는데 고작 3주 만에 웬만한 영어를 모두 배웠어요. 정말 죽기 살기로 열심히 공부했죠. 그때 배운 걸 지금도 잊지 않고 있으니까요”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카투사로 복무했던 전국 기수모임 회장이자 팽성 K-6캠프험프리스수비대 수송보좌관으로 근무하는 김복현(60) 씨는 이미 정년퇴직을 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68세까지 부대 내에서 연장근무를 하고 있다. 수송팀은 비행기·배·차량·열차·수화물 등을 모두 관리하는 부서로 호봉수가 조금 줄긴 했지만 원칙과 성실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미군들 사이에서 연장근무까지 할 수 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어서 평소 그의 근무태도가 어떠했는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젊은 시절 악착같이 카투사에 남으려고 노력했던 것도, 공무원을 그만두고 부대에 취직했던 것도 모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그땐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었으니까요. 무작정 영어공부에 매달려 차츰 미군들과 언어소통을 하게 됐고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낸 덕분에 남동생 두 명을 모두 제 손으로 대학까지 보냈죠”
김복현 씨는 인생의 절반 가까운 35년이라는 세월을 미군들과 함께 생활해왔다. 처음 부대에 들어가 서양 음식을 먹느라 고생했던 시절부터 현재 그들과의 소통은 물론이고 문화와 습성까지도 훤히 꿰뚫고 있는 김복현 씨는 가장 중요한 건 배우려는 의지고 노력이라고 말하며 활짝 웃는다.

배우고 익히는 건 가장 중요한 일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며 힘든 일도 많았지만 무엇이든 정신력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됐어요. 미군들은 원칙과 기본을 지키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부대에서 근무하며 가끔 속상한 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죠”
김복현 씨는 부하직원들에게도 항상 공부하는 자세로 지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게 그의 삶의 철학이자 생활의 소신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도 환갑을 마주한 나이지만 영어는 물론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공부하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공부하며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죠. 저는 제 아이들을 키울 때도 항상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곤 했어요. 영어도 직접 가르쳤구요. 지금도 아이들은 제게 휴대폰으로 영어에 대한 궁금한 점들을 물어오곤 하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변형들은 스스로 찾아보라고 가르치곤 해요. 스스로 깨우쳐야 오래 남는 법이니까요”
살아오는 동안 김복현 씨가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건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쓴 글에서였다. <목민심서>나 <경세유표>, 다산이 남긴 시에서도 그는 다산의 깊은 혜안과 성찰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고전에서 삶의 지혜를 배워
“다산 선생의 글에서 배우게 되는 점이 참 많아요. 좋은 글들은 스크랩해서 두고두고 읽기도 하고 직원들에게 강의할 때 쓰기도 하죠. 우리들의 생활이 고전을 기본으로 한다면 많은 사회적 문제들도 사라질 텐데 말예요. 고전을 무조건 고리타분하다고만 할 게 아니라 연구하고 배우는 자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특히 젊은이들의 경우 무엇이든 열심히 공부하는 풍토가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깝죠”
김복현 씨는 얼마 전, 68세에 퇴직하면 살게 될 집을 지었다고 말한다. 모든 시설이 완비된 그 집은 현재 비어있지만 이따금 지인들에 의해 불이 켜지기도 한다. 퇴직까지는 아직 7년이라는 시간이 남았음에도 미리 집을 지은 이유는 남도여행을 하거나 그곳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무료로 빌려주기 위해서라는 게 김복현 씨의 설명이다.
“고향에 내려가면 이장을 맡아 마을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요. 그리고 시골에서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영어를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 영어도 가르쳐주고 싶구요. 나한테 배운 아이들이 다시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겠죠”
같은 부대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한 것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하는 김복현 씨. 돈은 꼭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된다며 봉사하고 베푸는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복현 씨는 고전을 읽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삶을 깊이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지점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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