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약사 40여년,
돈보다 사람을 벌었죠”

잘 자란 아이들과 착한 아내가 제일 큰 재산
힘든 일 생기면 가장 먼저 찾는 동네 해결사


 
동네 의원이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대형 병원들이 자리하듯 이젠 주변에서도 동네마다 몇 개씩 있던 ‘농약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됐다. 도농복합도시인 평택도 이젠 고작 20여개 정도에 불과하니 이는 예전에 비해 농업인구가 현격히 줄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40년만의 깨달음 “외상은 안 돼”
“받지 못한 외상값만 따져도 억 단위니까 옛날로 따지면 집 몇 채 값은 되는 셈이죠. 농사꾼은 우선 외상으로 씨앗과 농약을 사고 수확하면 갚곤 했는데 막상 때가 되면 안 갚고 도망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예요. 농약사 40년 만에 깨달은 건 외상을 주면 절대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죠”
현덕면 신왕리가 고향으로 안중 현화리에서 40여 년간 ‘크로바농약사’를 운영하고 있는 배웅렬(64) 대표는 이십대에 시작한 농약사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외상값부터 생각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외상값을 받으러 가면 그 집 형편이 너무 딱해 오히려 쌀을 사주거나 돈을 보태주는 경우도 있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아내는 이제 절대 외상을 안주겠다고 하지만 막상 얼굴보고 외상 달라하면 어디 안 줄 수가 있어야죠. 주변 사람들이 저한테 아내 덕분에 먹고 산다고 하는데 그 말은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손님들도 아내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힘들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한결같이 곁을 지켜주는 아내가 제겐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죠”
배웅렬 대표는 평택군에서 함께 4-H활동을 하던 20살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이어졌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처가를 갖고 싶다는 우회적인 말로 아내자랑을 내비친다. 그러나 그의 아내자랑 속에는 오래전 모든 것을 잃은 후 1평 조금 넘는 단칸방에서 고생을 시켜야 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숨어있다.

보증 서줬다 모든 것 다 잃어
“여동생 보증을 서줬는데 그게 부도가 나는 바람에 집까지 모두 잃게 됐어요.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 잠잘 방도 없고 도저히 데리고 있을 수가 없어 서울에 있는 이모네 집으로 보내야 했죠. 막막한 심정으로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구요”
배웅렬 대표는 한 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몸과 마음이 피폐했던 당시, 우연히 딸아이가 남자친구와 걸어오자 이유도 묻지 않고 종아리를 때렸는데 다음날 오해였다는 걸 알았을 때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혼자 울기도 했다. 그때의 미안함은 시집을 가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아이를 볼 때도 여전히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이들을 키워야 했으니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야 했어요. 궁리 끝에 아내를 데리고 합덕에 있는 농약도매상에 찾아가 농약을 무상으로 대주면 팔아서 갚겠다, 만일 못 갚으면 내가 이곳에 와서 운전기사라도 하고 아내도 여기에서 일할 테니 제발 한 번만 도와달라고 사정했죠”
당시 모든 것을 잃고 빚까지 떠안은 그를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성 있는 간곡한 청에 도매상 사장은 고맙게도 선뜻 물건을 대주겠다고 나섰고 그때의 친절한 도움이 지금까지 농약사를 이어오게 된 계기가 됐다고.

터줏대감, 이웃 일은 나의 일
“지금까지 벌어놓은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그래도 주변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항상 저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많아요. 어려운 문제도 해결사처럼 나서서 처리해주고, 억울한 사람에겐 자청해서 인생 상담 해주고, 동네 골칫거리는 내일처럼 나서서 해주느라 실속은 없지만 그래도 사람 복은 타고 난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아내 복과 자식 복이 제일 크죠”
배웅렬 대표가 입버릇처럼 자랑하는 착하게 자라 준 두 명의 자식 가운데 큰 딸은 바로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우리는 형제입니다>를 쓴 배세영 작가다. 배세영 작가는 <미나문방구> <사랑방선수와 어머니> <적과의 동침> <킹콩을 들다> 등 연이어 히트작들을 내놔 영화계에서도 인기 있는 작가로 손꼽힌다.
“얘기하다가 생각해보니 실속 없이 남 도와줬던 건 진짜 오래전부터네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중학교 3학년이었던 형편이 어려운 후배 등록금을 대주기 위해서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고 어머니가 보내주신 향토장학금까지 모두 썼던 기억이 있거든요. 물론 어느 날 갑자기 그 동생도 사라져버렸지만 어려운 사람 못 지나치는 성격을 타고났으니 어쩌겠어요”
‘0’도 아닌 ‘마이너스’에서 출발해 현재까지 꿋꿋하게 이어왔다는 배웅렬 대표, 아내와 아이들이 가장 큰 재산이고 자랑거리라고 말하는 배웅렬 대표는 지금도 가게를 지키기 보다는 밖에서 더 많이 돌아다니는 자신에게 아내는 오늘 아침에도 눈 한번 안 흘기고 어서 나가라 등 떠밀었다며 큰 소리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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