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영화 같은 인생 살았죠”

 

일흔 넘은 나이에도 현역배우로 맹활약
2013년 한국예총 악극명인 1호 지정돼


 

 

 
연예인의 화려함 이면에 숨어있는 눈물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난하지만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해 충무로를 전전하고 그로 인해 일찍부터 인생의 희로애락을 알게 됐다면 아마도 그의 삶 자체는 한 편의 영화가 될 수도 있으리라.

배우가 되고 싶던 어린 날
“여섯 살 때 형님이랑 서울 수도극장에서 악극을 본 후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형님이 왜 배고픈 광대가 되려 하느냐며 딴 생각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했지만 내 꿈은 그때부터 줄곧 광대가 되는 거였으니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죠”

8남매 중 막내로 안중이 고향인 공성철(72)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평택시지회장은 실제로 아홉 살 때 ‘검사와 여선생’이라는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0대가 되면서는 악극단에 소속돼서 남한 일대를 안다녀본 곳이 없었어요. 천막치고 공연하면서 관객이 없으면 밥도 굶고, 선배들이 시키는 온갖 심부름을 다 했지만 역을 하나 맡을 때마다 그렇게 좋았죠. 그러다 10대 후반에는 서서히 주인공을 맡게 됐고 다른 극단에서도 서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땐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점점 선후배도 모르는 안하무인이 되어갔죠”

공성철 지회장은 당시를 젊었기에 어리석기도 했었던 때라고 회고한다. 그의 무모한 자신감은 직접 쓴 <밤에 핀 장미꽃>이라는 시나리오로 영화제작에 감독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자 빚 독촉에 시달려 자살까지 시도하기도 했다. 그때가 고작 스물한 살 때였다.

전국을 누볐던 젊은 날
“그땐 집에도 못 들어갔죠. 사람노릇 못한다는 형님들의 훈계도 듣기 싫었고 무엇보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설렁탕 한 그릇도 못 사드리면서 내내 속만 썩여드렸으니까요. 그래도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쇼단을 구성해서 전국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가수 이미자 씨와도 함께 다녔죠. 공연날짜를 잡으면 직접 포스터도 붙이고 마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북이나 꽹과리를 치면서 홍보하기도 했어요”

공성철 지회장은 당시 공연을 위해 기지촌으로 찾아다닌 이야기도 들려준다. 20대 초반의 기지촌 여성들은 쇼를 보고 울고 웃으며 마음을 함께 해준 관객들이었다. 공연단이 돈이 없어 공연소품을 여관에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자신들의 돈을 내고서라도 찾아서 전해주던 마음 따뜻한 이웃이고 누이들이었다고.

“한창 잘 나가던 20대 중반에는 ‘국제영화배우학원’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운영하기도 했는데 막상 군대 갔다가 제대하니 삶이 참 막막하더라구요. 잠시 형님이 하던 전기공사 일을 돕기도 했지만 항상 내가 있을 곳은 무대라는 생각 때문에 참 많이 힘이 들었죠. 내 안에 들어있는 끼를 숨기지 못해 연예계를 떠돌았지만 끝내 자존심까지는 버리지 못하겠어서 그게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공성철 지회장은 결국 삶과 타협하며 연예계에 대한 열망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참한 은행원과 결혼한 후 40대가 되어서야 고향인 평택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이후 그의 다양한 활동을 알고 재능을 아까워하던 지인들의 권유로 1996년 12월 평택연예협회를 재 인준 받아 그동안의 경력을 토대로 지회장에 취임했다.

남은 생도 무대 위에서 보내고파
“악극은 우리나라 뮤지컬인데 지부 초창기부터 해왔어요. 내가 기획·극본·연출까지 다 맡고 있죠. 매년 광복절에는 특집극으로 악극을 준비하는데 배우들 모두 무보수인데다 힘들게 연습하고 무대에 올려도 막상 공연이 끝나고 나면 제대로 밥 한 끼 사주기 어려워 마음이 아프죠”

공성철 지회장은 2013년 5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악극명인 1호’로 지정됐다. 연예계라는 험한 곳에서 천태만상의 인간군을 보며 실망도 하고 삶의 핍박도 받을 만큼 받아본 그였지만 여전히 무대는 그에게 버릴 수 없는 곳이자 마지막까지 남아있고 싶은 안식처다.

“일흔이 넘었지만 아직도 무대에서 연기를 해요. 지금은 장성한 아들들이 와서 소품도 날라주고 사진도 찍어주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라 가장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살았지만 지금은 나이가 드는지 점점 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아이들을 잘 키워낸 아내에게 가장 미안하고 고맙죠”

전통 악극의 맥을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공성철 지회장, 지금도 무대세트까지 직접 챙기며 현역 배우로 맹활약하고 있는 공성철 지회장은 이야기가 무르익자 킥복싱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세운 큰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잘 생긴 작은아들에게 배우 해보라고 회유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두 아들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평생 자존심 하나로 살아오며 타인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을 것처럼 보이는 그의 굳었던 얼굴이 두 아들 이야기에 금방 환하게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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