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건강하세요”

 

굶어죽기 직전 북한에서 목숨 건 탈출
딸 보낸 뒤 행방 묘연한 엄마 그리워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건너온 북한이탈주민의 수가 점점 늘어간다. 자주 접할 수는 없지만 가끔 이들과 만나 이야기하다보면 북한에서도 가족이 함께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와 똑같구나 하는 생각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매일 굶어야했던 북한생활
“북에는 오빠와 남동생이 있는데 둘 다 일찍 군대에 갔고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러시아로 벌목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이십대가 되어서 한 남자랑 약혼을 했는데 시어머니 되실 분이 내가 작은 키에 비쩍 말랐다고 애나 낳을 수 있겠느냐며 파혼하자고 했죠. 그때부터 엄마랑 둘이 장사를 했어요”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이하나(가명·45) 씨가 말하는 장사란 우리가 생각하는 장사와 다르다. 100kg 배낭을 메고 집에서부터 아흔아홉 고개를 넘어 100㎞ 거리인 원산까지 가야 물건을 팔 수 있다. 산 속에서 잠자는 것은 물론 산나물을 캐서 간신히 끼니를 이으며 밤낮을 걸어 적은 양의 곡물이라도 팔아야 그나마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고.

“엄마랑 중국 접경지인 혜산까지 한 달 반을 걸었는데 그만 영양실조로 열병에 걸리게 됐어요. 그땐 산 속에서 배고파 죽은 아이들 시체도 많이 봤죠. 내가 기차역 화장실에서 쓰러졌을 때 엄마가 정신 차리라며 내 뺨을 때리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먹을 걸 동냥해서 내게 먹인 기억이 나요. 엄마는 날 붙들고 울면서 나는 괜찮으니 너라도 살아야 한다고 그러셨죠”

이하나 씨는 엄마의 간곡한 말을 듣고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엄마를 데리러 오겠노라 결심했다고 말한다.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나라에 있느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한가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목숨 건 두 번의 탈출시도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기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까지 갔다가 북한으로 붙잡혀온 적이 있어요. 다행히 엄마 도움으로 간신히 수용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엄만 날 꺼낸 즉시 다시 등 떠밀며 중국으로 가라고 하셨죠. 그날이 1998년 1월 1일이었어요”

이하나 씨는 당시 자신의 등을 떠밀던 엄마 얼굴을 죽어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남겨질 당신은 생각지 않고 오로지 딸을 위해 중국으로 가라 했던 엄마가 없었으면 자신은 이미 북에서 굶어죽었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살기 힘들었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건너간 탈북여성들은 주로 브로커들을 통해 중국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넘겨져요.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선택의 여지는 없죠. 나도 그때 돈을 받고 시골에서 농사짓는 조선족에게 팔려갔는데 다행히 마음이 따뜻한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과 사는 동안 아기를 가졌는데 탈북자여서 병원에도 못가고 산속에서 혼자 아이를 낳았죠. 신고하면 바로 끌려가니까 늘 숨어서 지내야 했어요”

이하나 씨는 이후 중국 청도로 건너가 한국사람 집을 돌아다니며 가사도우미를 했다고 말한다. 아기가 어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항상 불안에 떨며 지냈던 그녀는 아이가 열다섯 살이 되자 남한에 가기로 결심했다.

당당하게 살 수 있어 행복
“조선족인 남편은 나보다 먼저 남한에 와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시어머니 간병을 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평소 알고 지내던 조선족 집에 아이를 맡기고 6개월 치 아이 생활비와 여유비용을 선불로 주었죠. 아이를 설득하는 일이 제일 힘들고 어려웠는데 다행히 아이가 이젠 당당하게 살고 싶다는 내 입장을 이해해줬어요. 닷새 동안 산길을 걸어 태국으로 갔다가 그곳 대사관에서 남한에 가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남한으로 넘어올 수 있었죠”

이하나 씨는 2013년 10월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이후 국정원에서 3개월, 하나원에서 3개월 조사와 교육을 마친 뒤 경기남부하나센터로 배치돼 그곳에서 우리나라에서의 실생활을 몸에 익히고 취업준비도 마쳤다. 현재 그녀는 평택의 한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며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2014년 9월에는 딸도 데리고 왔어요. 남편은 지방에서 일하기 때문에 주말에만 모이죠. 아이는 대학에서 다문화과정인 디딤돌스쿨에 다니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요. 이제 고등학교도 보내야죠. 얼마 전에는 작지만 집도 생겼어요. 이제 열심히 일해서 사는 일만 남았죠. 남한에 와서 가장 좋은 건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물론 지금도 밤에 불 끄고 자리에 누우면 엄마 생각에 매일 울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 제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앞으로는 열심히 음식을 배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살아 계신지 그것만이라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눈물 흘리는 이하나 씨, 딸을 살리기 위해 당신의 희생을 감내하신 엄마 때문이라도 이곳에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하나 씨는 이야기 도중 엄마 얘기가 나올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연신 휴지로 닦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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