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규 선생이 겪은 평택


역사는 사람이 만듭니다.
그리고 한 번 만들어진 역사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살벌한 평택이라는
오명汚名을 씻어내는 일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몫일 것이지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가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를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으로 가서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 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귀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꿔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 살 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걸음이 빨랐다. 뒤에 따라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했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골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 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메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다 잃고 바보같이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 2012년 박동규 선생 강연에서 따온 글

시인 박목월 선생 아들 박동규 교수가 지금부터 60여 년 전인 6.25한국전쟁 때 피난을 가며 겪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평택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낯이 벌겋게 달아오르리만치 너무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독자들과 함께 읽고 싶어 이 글을 옮겨왔습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 데 가서 자라고 했다’

평택 옆 바닷가 어느 조그만 마을이었다니 포승이었을까요? 만호리였을까요?

엄마 혼자 갓난아이와 5살 먹은 여자아이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이던 박동규까지 아이들 셋을 데리고 피난을 가고 있는 가족에게 아무리 전쟁을 치르고 있던 때라고 하지만 평택이 이렇게 야박하고 몰인정한 땅이었을까요! 

그렇다면 60여년이 지난 지금의 평택 인심을 외지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지도 자못 궁금해집니다.

박동규 선생은 학자니까 절대 거짓을 말하시는 분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 평택사람이 피난민에게 보여준 악랄하기까지 한 비인간적인 작태가 뒷날 평택에 먹칠을 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오직 물질만을 좇으며 각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역사는 사람이 만듭니다. 사람이 곧 역사인 것이지요. 그리고 한 번 만들어진 역사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살벌한 평택이라는 오명汚名을 씻어내는 일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몫일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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