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포천 시작점 계양하구에는 경양포가 있었으며
상류로 올라가 노산포·신성포·시포·둔포가 있었다
이들 포구는 조운漕運이나 포구상업·어업과 관련 있었다

 

1905년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고
교통이 철도역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둔포장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둔포천으로는 여전히
생선배와 소금배가 들어왔고
충청수영로는 국도로 바뀌었지만
시장市場이 철도교통에서 유리되면서
상품유통에 크게 제약받았다.
1934년 시장개황에서도 둔포장은
평택장의 1/29정도의 거래량을 보였다.
서정리장·안중장보다도 낮은 액수로
근대교통의 발달에 따라
둔포장의 쇠락이
본격화되었음을 알게 한다.

▲ 노성2리에서 바라다본 안성천 지천과 둔포


10 - 둔포와 함께 아산만 포구상업을 책임졌던 신성포

평택은 물의 고장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40여 개나 되는 하천이 평택평야를 가로질러 아산만으로 흘렀다. 바다와 하천은 수로, 해로교통의 수단이었고, 갯벌은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며, 나루와 포구는 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나루·포구, 그 위의 삶’을 연재한다. 물과 함께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삶을 함께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신성포마을에서 바라 본 둔포천과 둔포
▲ 팽성읍 노성1리 신성포마을
■ 충청수영로의 거점도시 둔포
안성천은 15개 내외의 지류가 흐른다. 둔포천은 안성천 지류 가운데 아산만과 가장 가깝다. 예로부터 둔포천 수로에는 나루·포구가 많았다. 둔포천의 시작점인 계양하구에는 경양포가 있었으며, 상류로 올라가면서 노산포·신성포·시포·둔포가 있었다. 근대전후 이들 포구는 조운漕運이나 포구상업 그리고 아산만 어업과 관련 있었다.
둔포·신성포 일대가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아산만 수로와 충청수영로라는 육로교통의 교차점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안성천 하류에서는 강다리·숭어·갯장어·황석어·밴댕이가 풍성하게 잡혔다. 또 겨울에는 굴과 바지락·제염업이 발달해서 포구상업과 어업발달의 유리한 조건을 형성했다. 아산만 일대에서 생산된 어염가운데 일부는 경양포에서 소비되었지만 대부분은 둔포·신성포·시포로 들어와 둔포장에서 거래되었다.
둔포 일대의 포구들이 번창하면서 곳곳에 장시가 형성되었다. 둔포장이 그것이다. 둔포장은 19세기 초에 작성된 <지리지>나 19세기 후반의 <읍지邑誌>에도 확연히 나타난다. 개시일은 2일과 7일이었는데, 1일에 개시한 성환장, 3일이었던 평택장, 4일인 아산장, 5일인 소사장과 함께 오일장을 형성했다. 1913년에 발표된 경기남부지역 장시의 거래량을 보면 둔포장은 총 거래량 3만 3624원으로 인근의 성환장·안중장·서정리장보다 월등히 앞섰다. 거래 품목에서도 농산물과 함께 아산만 일대의 어염이 함께 거래되어 상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1905년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고 근대교통이 철도역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둔포장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둔포천으로는 여전히 생선배와 소금배가 들어왔고 충청수영로는 국도 45호선으로 바뀌었지만 시장市場이 철도교통에서 유리되면서 상품유통에 크게 제약받았다. 1934년 총독부가 발표한 시장개황에서도 둔포장은 74만 6620원인 평택장의 1/29에 불과한 2만 5500원의 거래량을 보였다. 이것은 서정리장이나 안중장보다도 현격하게 낮은 액수로 근대교통의 발달에 따라 둔포장의 쇠락이 본격화되었음을 알게 한다.

▲ 신성포와 둔포를 잇는 노성교
▲ 노성들에서 바라본 신성포마을
■ 둔포장의 배후 포구浦口 신성포
팽성읍 노성1리 신성포는 둔포천을 경계로 아산시 둔포면과 마주보고 있다. 신성포 동쪽의 노성교를 건너면 곧 둔포장이요, 둔포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신성포다. 신성포 북서쪽에는 시포가 있다. 근대 이전 세포구는 둔포장을 중심으로 번영했다.
신성포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조선 후기다. 노양리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주민 박성호(78세) 씨는 증조부 때 안성시 양성면에서 이주하였다고 하였다. 통상 1대를 30년으로 계산했을 때 대략 150여 년 전부터는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게 한다. 마을의 규모는 해방 전후에는 50호 내외였고 현재는 40호를 조금 상회한다. 신성포 마을이 축소된 것은 아산만방조제 준공으로 포구상업과 어업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마을주민 이천수(80세), 박호분(80세) 씨도 둔포천과 군계천 제방공사를 하면서 천변 가옥들 일부가 철거되고 아산만방조제 공사로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가면서 마을규모가 줄었다고 말했다.
신성포는 포구 일대가 저습지거나 갯벌이어서 땅이 거칠고 질퍽댔다. 그래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우물도 건건해서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부족한 식수는 물지게를 지고 섶다리를 건너 둔포까지 가서 길어왔다. 1960년대 말에는 참다못한 주민들이 관정管井을 박아서 물을 끌어올렸지만 퍼 올린 샘물은 철분이 많아서 시뻘겋게 변해버렸다.
오래전 인터뷰했던 신순희(77세) 씨도 물지게를 지고 발이 푹푹 빠지는 개흙 길을 걸어오다 뒤로 자빠지는 바람에 속상해서 펑펑 울었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박호분(80세) 씨도 빨래터에서 자박지에 빨래를 이고 오다가 진흙바닥에 넘어져서 애써 빨아 놓은 빨래들을 모두 버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서 주민들은 돈만 모이면 다른 마을로 이사 가버리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인간의 생존에 버거운 조건들뿐이었지만 주민들이 신성포를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포구 때문이었다. 포구와 갯벌은 부자를 만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민중들이 살아가기에 최소한의 조건을 제공했다. 신성포 뱃터는 노성교 아래에 있었다. 뱃터에는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기 전까지 배가 들어왔다. 둔포천과 군계천이 갈라지는 세갈포에도 배가 닿았고 건너편 둔포에는 더 많은 배들이 빽빽하게 정박했다. 정박한 배들은 새우젓배와 소금배가 많았다.
봄가을에는 고깃배, 겨울에는 굴젓배도 많이 들어왔다. 포구에 배가 들어오면 마을 여자들은 함지박에 새우젓을 받아 드럼통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줬고 남자들은 드럼통에 담긴 새우젓을 둑 위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갯가에서 새우젓이 든 드럼통을 옮기는 작업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겨울철 푹푹 빠지는 갯벌에서 젓갈통을 옮기다 하도 힘들고 서러우면 굵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하지만 신성포에서는 눈물도 사치였다. 그렇게 살아냈다. 
 
▲ 새우젓배 굴젓배가 드나들었던 신성포 나루터
▲ 둔포읍내에서 62년째 옷장사를 하고 있는 대덕상회

■ 그들은 살아온 삶이 역사다
아산시 둔포면 둔포리는 시골 면소재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번화하다. 상업포구의 전통 때문인지 거리의 상가들은 곡물이나 생필품을 파는 가게보다 술집이나 다방·노래방이 더 많다. 내포지역의 물산과 아산만·남양만의 어염이 집결되던 둔포장도 이제는 장날 오전만 반짝하는 반짝이 장이 되버렸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둔포리는 1구와 2구로 나뉘었다. 1구는 포구와 둔포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업지구였다면 2구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둔포장은 싸전이 가장 컸다. 팽성읍 객사리 사람으로 30세에 둔포에 정착한 이영수(86세) 씨는 장날이면 90kg짜리 쌀 1500가마가 거래되었다고 말했다. 포구에는 새우젓배·소금배가 가장 많이 들어왔다. 소금배에는 한 척에 소금 300~400가마가 실려 있었다.
임 씨는 둔포천 입구인 계양해구에서 둔포까지 배가 들어오려면 아흔아홉구비를 돌아야 했다고 말했다. 밀물에도 수심이 일정하지 않고 여울이 많았던 둔포천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새우젓배가 닿으면 일꾼들이 올라가 독에 담긴 새우젓을 하역했다. 이것을 둔포 상인들에게도 팔았고 곡물을 들고 온 농민들과 물물거래도 하였다. 상업이 번창하다보니 1950~60년대에는 화교들이 운영하는 상점도 너 댓집이나 되었다. 화교들은 성씨에 따라 사서방·모서방·임서방으로 불렸다. 이들은 비단장사나 포목장사를 많이 했는데, 1980~90년대 둔포상권이 약해지면서 일부는 떠나고 이제는 한두 집만 남았다.
지금도 둔포에서 토박이를 찾기란 무척 어렵다. 상업도시답게 수십 년 장사는 했어도, 수백 년 살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 서울보신탕을 운영하는 나 씨는 1960년대 초 전라도 전주에서 올라왔다. 둔포는 포구가 있고 들이 넓은데다 거리가 번화해서 일거리가 많았다. 밀물을 따라 새우젓배·소금배가 들어오면 노성교까지 길게 늘어진 포구에는 선박들로 꽉 차고, 둔포장날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포구 사람들 가운데는 월남 피난민들도 있었다. 대덕상회를 운영하는 임병숙(85세) 씨는 삼팔따라지다. 1.4후퇴 때 평안북도 박천에서 내려와 둔포 피난민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수용소에서 나온 뒤에는 남의 집 곳간을 빌려 기거하면서 남편은 K-6미군기지 공사장에 다녔고 임 씨는 덕산상회를 열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장터 옆에 대덕상회를 개업했다. 개업 후 말품·발품을 팔며 신용으로 장사한 덕에 이제는 둔포장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 둔포시내 중심의 옛 일본가옥(현재 중국인이 거주한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