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는 마을과 마을, 지역과 지역을 나누는 경계였다
혼인을 할 때도, 장에 갈 때도, 학교에 갈 때도
때론 도회지로 나가는 기차를 탈 때도 고개를 넘어야 했다
 

 

평택은 충적평야가 발달한 평야지대다.
높은 산이래야 200m 이하고
낮은 산은 20~30미터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고개가 적은 것도 아니다.
낮은 지대인 만큼
구릉에 걸맞은 낮고 완만한
고개들이 무수히 많다.
고개는 때론
나그네의 쉼터이기도 했다.
주막에는 사연도 많다.
근래 요행히 살아남은 주막집에 앉아
오가는 행인들과 말을 섞다보면
말로는 채울 수 없는
수많은 사연들을 만난다.

 

 



 

1 - 민중들의 삶과 애환이 서린 ‘고갯길’ 연재를 시작하며…

 
▲오성면 양교5리 여술마을 문장자고개

 

 

■ 추억追憶과 한恨의 고갯길
어린시절 5km가 넘는 길을 걸어 초등학교에 다녔다. 전기도 버스도 없던 때였다. 동네 아이들은 친구들이 밥 먹기를 기다렸다가 열 명 또는 스무 명씩 짝지어 함께 걸어갔다. 학교 가려면 서낭댕이·장승백이·구뫼재빼기를 넘어야 했다. 우리들에게 고개는 이정표였으며 넘어야 할 과제였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64%가 산림이라고 한다. 근래 난개발로 산림훼손이 이뤄졌기 때문이지 과거에는 70%가 산림이었다. 산림이 많다보니 고개도 많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 지역과 지역을 나누는 경계였다. 혼인을 할 때도, 장에 갈 때도, 학교에 갈 때도 때론 도회지로 나가는 기차를 탈 때도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고개는 때론 나그네의 쉼터이기도 했다. 고개를 넘나들며 지친 사람들은 고갯마루 주막집에서 김치쪼가리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들이켰다. 1963년에 발표한 소설가 오영수의 단편소설 <고개>에 펼쳐진 풍경이 그러하다. ‘길이 보였다 숨었다 하면서 산등성이 잘록한 고개를 넘어갔다. 이 고개를 십리고개라고 불렀다. 십리고개 마루턱에 길이 곧 마당인 조그만 초가가 딱 한 채 있었다. 육십이 넘은 할머니가 고개를 넘나드는 길손과 장꾼들에게 밀주를 팔며 사는 집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 가면 이런 풍경을 곧 잘 만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조령산 겨울등산을 마치고 들어간 충북 연풍의 어느 주막집 풍경도 이러했다. 비슷한 시기 남원과 함양 경계의 지리산 팔령재 아래에서 만난 어느 주막도 다르지 않았다.
주막에는 사연도 많다. 근래 요행히 살아남은 주막집에 앉아 오가는 행인들과 말을 섞다보면 말로는 채울 수 없는 수많은 사연들을 만난다. 정신대 차출을 피해 열여섯에 억지 혼례를 올렸던 할머니이야기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돈 벌러 갈 수밖에 없었던 중년 남성의 이야기, 심지어 늦은 장場 보고 캄캄한 밤중에 고개를 넘어오다가 도깨비를 만났다는 촌로의 경험담까지. 1950년대 반야월이 작사하고 이해연이 불렀던 ‘단장의 미아리고개’에는 한국전쟁 때 미아리고개를 넘어 납북되었던 남편을 애통해하는 아내의 가슴 아픈 사연이 펼쳐진다. 코미디언 구봉서 씨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고개는 한恨이다. 눈물로 범벅이 된 분단分斷과 이산離散이다.

 

▲진위면 가곡2리 가야실 서낭고개

▲오성면 봉무들고개에서 바라본 안중읍 금곡리 관두머리고개

 

■ 고개는 이야기꾼이다
우리나라 옛날이야기 가운데는 고개와 관련된 것이 많다. 총각이 남근으로 호랑이를 물리쳤다는 ‘천명고개이야기’는 유난히 고개가 많았던 전라도 남원에 전해오는 전설이다. 눈먼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임금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았다는 ‘박석고개이야기’의 주인공 ‘박석고개’는 서울 연신내에서 구파발로 넘어가는 높지 않은 고개다.
전라도 장수에서 경상도 함양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는 육십령이다. 덕유산과 백운산, 지리산을 잇는 백두대간의 요지여서 화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바람에 장정 60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다는 무시무시한 고개. 수원에서 의왕시로 넘어가는 ‘지지대고개’는 본래 사근현이었는데 정조가 수원의 사도세자릉인 헌원릉을 참배하고 돌아갈 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지체했던 곳이라고 해서 유래된 지명이다.
동해안의 소금과 어물이 넘나들던 소백산 기슭의 죽령에는 ‘소금장수’ 이야기가 많다. 늦은 밤길을 재촉하다 길을 잃은 소금장수가 깜박이는 불빛을 보고 찾아갔다가 백년 묵은 여우에게 홀렸다는 스토리. 어릴 적 수백 번도 더 들어 뻔한 이야기.
필자의 고향에서 가장 무서웠던 고개는 ‘장승백이’ 였다. 장승백이는 면사무소가 있는 서면이나 학교가 있는 도둔리를 오갈 때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요지였다. 장승백이에는 어릴 적 친구였던 최 군 아버지가 비인장에 다녀오다 도깨비와 씨름하여 이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고개에는 현실성이 없는 옛날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1980년대 전반 강원도 화천 대성산 일대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강원도에서 군대생활을 하려면 산과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겨울철 눈이 내리면 1174m에 달하는 대성산 군사도로를 싸리비로 3일 동안이나 쓸어야 했고, 행군을 할 때는 수피령·카라멜고개·중고개·덕고개·말고개 같은 무시무시한 고개들을 넘어야 했다.
고개를 넘어 행군했던 경험은 분단 상황에서는 보편적 스토리지만 통일이 되고 기억이 아득해지면 고개가 말해주는 또 다른 전설이 되어 전승될 것이다.

▲이화지구(옛 소사벌택지지구) 택지개발로 사라진 재빼기고개의 폐허

 

▲죽백동 내촌마을  골품고개

■ 평택사람들도 고개를 넘었다?
평택은 충적평야가 발달한 평야지대다. 높은 산이래야 200m 이하고 낮은 산은 20~30미터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고개가 적은 것도 아니다. 낮은 지대인 만큼 구릉에 걸맞은 낮고 완만한 고개들이 무수히 많다.
우리고장의 대표적인 고개는 ‘흔치’라고도 부르는 ‘흰치고개’다. 흰치고개는 한자로 ‘백치白峙’라고도 하는데 삼남대로의 요지여서 샛길이 두 개나 되었다. 작은흰치재는 이충동 동령마을로 내려가는 고개다.
옛날에는 송북동 동막에서 작은흰치재를 넘으려면 음산한 서낭당을 지나야 했다. 삼남대로 따라 진위면 마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도 소백치 다시 말해서 작은 흰치재다. 마산리 작은 흰치재는 염봉이라는 별칭도 있다. 합정동 소사벌레포츠타운 옆으로 넘어가는 언덕은 ‘소금장고개’ 였다.
근대 이전 합정동 배미마을 주민들은 소금장고개를 넘어 평택장을 오갔다. 송탄 지산동 숯고개는 진위현의 해창이었던 고덕면 해창3리의 해창포와 연결된 고개였다. 그래서 숯뿐만이 아니라 쌀과 해산물의 유통이 많았다. 근대 전후에는 숯고개에 변음이 생겨 ‘쑥고개’라고도 불렸다.
평택 곳곳에는 평택장·안중장·서정리장과 연결된 ‘장고개’도 많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여염리 밀밭 사이로 구불구불 올라가던 장고개는 얼어버린 서정성을 일깨웠던 보물 같은 풍경이었다.
근대 이후 국도 1호선과 38호선·39호선이 건설되었다. 철길을 따라 평야지대에 건설된 국도 1호선에는 고개가 없었지만 서평택 방향으로 향하는 국도 38호선에는 크고 작은 고개가 많았다. 그 가운데 오성면 숙성리에서 안중으로 넘어가는 봉무들고개·관두머리고개·황금리고개는 과거 안중장에 소 팔러 가던 사람들과 목탄을 태워 달렸던 증기자동차에게는 넘기 힘든 장애물이었다. 그러다보니 고갯마루에는 주막들도 많았고 한국전쟁 때에는 죽고 죽이는 사건들도 자주 발생했다.
옛날 마을입구나 고갯마루에는 서낭이 있었다. 서낭은 산신의 다른 이름인 산왕山王에서 왔다고들 말한다. 서낭신앙은 고대사회에서 수렵과 목축·농경이 이뤄지는 삶의 공간을 신의 힘으로 지켜내려는 목적에서 생겼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평택지역에도 마을마다 서낭이 있었다. 서낭은 서낭나무와 돌무더기를 특징으로 삼았다. 서낭이 있는 고개에는 어김없이 ‘서낭고개’라는 지명이 있다. 안중읍 덕우리에서 용성리 오뚜기라면 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서탄면 내천리에서 오산방면으로 나가는 고개가 서낭고개다. 마을제당이 있는 곳에는 ‘당산’, ‘당고개’라는 지명이 있다. 비전2동 경남아너스빌아파트를 넘어가던 고개도 당재였고, 비전1동 자란마을도 당재 또는 당재랭이라고 불렀다.
낮은 구릉지대는 풍수지리적으로 ‘용의 형국’에 비유한다. 백운산 줄기에 위치한 용이동·구룡마을·청룡동·안중읍의 대반리 용두마을이 그것이다. 이들 마을에는 용고개·원고개·대문재·꽃밭재·골품(콤)고개 같은 예쁜 고개들이 많다. 낮은 구릉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올라간 고개는 ‘아리랑고개’다. 팽성읍 본정리에서 함정리로 올라가는 고개, 서정동 점촌마을에서 지산동으로 올라가는 고개가 아리랑고개였다. 팽성읍 본정2리 아리랑고개를 넘으면 선말고개다. 아리랑고개와 선말고개는 도두리 출신 가수 정태춘의 어릴적 고향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고개이름이 자주 나온다. 이번 호부터 ‘평택사람들의 길’은 고개를 넘는다. 고개에 얽힌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찾아간다.

 

▲포승읍 방림리 진틀고개

▲ ▲삼남대로 재빼기고개 배다리방죽 입구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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