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대로 평택구간에는 ‘춘향이 길’로 불리는 옛길이 있다
죽백동 3통으로 넘어가는 ‘재빼기 구간’이 그것이다
특정 구간을 춘향전에 빗대어 명명한 곳은 이곳뿐이다
 

 

삼남대로 재빼기 구간은
이화택지지구사업(구 소사벌택지)으로
대부분 유실되었다.
이몽룡과 춘향이가 담배를 빼어 물고
풍광을 즐겼다는 전설도,
하마비가 있어 말을 타고 함부로
넘나들 수 없었다는 대문재이야기도,
평택지역 배 과수농업의 역사도
잊혀 진 이야기가 될 판이다.
전통의 문화유산이 보존이나 활용계획 없이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늦었더라도 옛길을 공원부지로 확보하여
시민들이 산책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리일까

 

 


▲ 배꽃이 만발했던 삼남대로 재빼기길

 

2 - 춘향이와 이도령이 넘었던 죽백동 재빼기

 

평택지역은 평야와 물 그리고 구릉으로 형성되었다. 예로부터 평택사람들은 구릉에 기대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키고 소통하게 하는 고리였다. 평택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만나고 소통하며 살았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을 연재한다. 고개에 얽힌 평택사람들의 삶을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이화택지개발지구(구 소사벌택지지구) 내의 삼남대로
▲ 이화택지지구와 배다리저수지, 삼남대로 재빼기 구간 원경

■ 춘향전의 작가도 재빼기를 넘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세계적 러브스토리다. 세익스피어(1564~1616)는 이 작품을 1595년 경 집필했다고 한다. 당시 크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청년작가는 이 작품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소재는 아서 브루크의 <로메우스와 줄리엣의 비화(1562)>라는 작품에서 빌려왔다. 일종의 리메이크 작품인 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1597년 경(정확하지 않음) 연극으로 초연된 이래 베를리오즈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영화·발레·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로 공연되었다.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68년 제작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당시 줄리엣을 연기한 올리비아 핫세의 청순한 미모는 필자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많은 청소년들의 가슴을 들었다 놨다 했다.
한국판 러브스토리의 최고봉은 ‘춘향전’이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달리 춘향전은 희극이다. 이 작품은 18세기 경 판소리로 초연된 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한글소설로 출판된 뒤에는 동네 사랑방 이야기꾼들의 입을 통해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널리 퍼졌다. 그러면 민중들이 춘향전에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신분을 뛰어 넘는 러브스토리라는 점과 탐관오리 변사또가 치죄당하는 장면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신분은 팔자소관이어서 하늘도 바꿀 수 없다는 봉건사회에서 기생의 딸이 신분의 벽을 깨고 양반집 도령과 사랑만으로 결혼에 골인했다는 설정은 매우 발칙했지만 통쾌한 상상력이었다. 
경북 봉화의 계서당은 조선중기의 문신 계서 성이성(1595~1664)의 옛집이다. 성이성은 남원 부사를 지낸 성안의의 3남이다. 13세 때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서 살았고 1627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를 네 차례, 진주목사를 비롯하여 지방수령을 5차례 지냈다. 아버지가 남원 부사였던 성이성은 삼남대로를 따라 한양에서 남원까지 오르내릴 기회가 많았다. 경상도지역에서는 성이성의 일기와 후손들의 기록에 근거하여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묭룡이 성이성이며 그의 스승 조경남(1570~1641)이 원작자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춘향전에는 일반 서민들이 표현할 수 없는 상황과 용어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다. 하지만 사대부였던 조경남이 체통에 맞지 않게 어린 제자의 사랑 놀음을 한글소설로 썼다는 사실이 석연치 않을 뿐 아니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저명한 가문의 양반관료를 판소리 주인공으로 삼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는 사실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삼남대로 평택구간에는 ‘춘향이 길’로 불리는 옛길이 있다. 비전동 배다리저수지에서 죽백동 3통으로 넘어가는 ‘재빼기 구간’이 그것이다. 물론 소사동 1통 소사교, 진위면 봉남리의 진위목교(봉남교)에도 춘향이와 이도령의 이야기가 전하지만 특정 구간을 춘향전에 빗대어 명명한 곳은 이곳뿐이다.

 

▲ 이화택지지구 개발 중인 배다리저수지와 재빼기구간
▲ 비전동 배다리저수지 옛 뱃터부근

■ 경관이 변하면 길도 바뀐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63.7%가 산이다. 그러다보니 곳곳에 악명 높은 고개들이 많다. 예로부터 큰 고개는 령嶺이나 치峙로 불렀고 비교적 작은 것은 ‘재’ 또는 ‘고개’였다. 예컨대 대관령·한계령·육십령·정령치·우금치는 큰 고개이지만 박달재·염돈재·싸리재는 그보다 작은 고개인 것은 그런 이유다. 재빼기는 ‘재’의 사투리다. 평택지역에서 재빼기는 대백치·소백치와 함께 삼남대로 평택구간에서 가장 높은 고개다. 특이한 것은 본래 이름이 있었을 텐데도 언제부턴가 앞의 고유명사는 사라지고 ‘재’ 자체가 고유지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전동 배다리에 저수지가 만들어진 것은 1944년경이다. 일제 말에는 하늘도 노怒했는지 몇 년에 걸쳐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었다. 전시물자수급에 비상이 걸린 일제는 서둘러 경지개간과 저수지 확보에 열을 올렸다. 저수지가 축조되기 전 배다리에는 이곡천이 흘렀다. 안성천과 통복천을 따라 유입된 바닷물은 이곡천 수위를 높이며 배다리저수지 위쪽까지 올라갔다. 저수지 중간쯤에는 뱃터와 교리橋里라는 진촌津村이 있었다. 뱃터에는 아산만에서 새우젓배가 드나들었다. 삼남대로는 배다리에서 발이 묶였다. 밀물에 조수라도 밀려들면 강폭이 넓어져 도저히 넘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뱃터 근처에 배다리舟橋가 놓였다.
배다리를 건너면 새로 이전한 평택세무서가 있는 배다라지골을 따라 두레봉·재빼기가 이어졌다. 또 구릉과 구릉 사이로는 대문재·왕지미고개·곰봉고개·골품고개 같은 크고 작은 고개들이 갈라져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다. 재빼기는 여러 고개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길고 인적이 드문 고갯길은 풍광도 수려했지만 여행자들이 깊게 심호흡을 해야 넘을 수 있었다. 재빼기는 조선 후기 간척으로 크게 변했다. 조수가 밀려들던 이곡천 주변이 간척되어 이곡들이 조성되고 구릉 아래에는 산직촌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과 경작지가 조성되면서 산직촌 뒤쪽에는  배다리에서 칠원동 1통으로 빠지는 직선로가 만들어졌다. 옛 영풍원 앞길이 그것이다.

 

▲ 배다리저수지 옆의 상가와 아파트 조성공사
▲ 삼남대로가 지났던 죽백3동 재빼기마을

■ 옛길은 어떻게 보전해야 할까?
죽백동 3통 재빼기마을은 땅이 메말랐다. 토관(노깡) 12개를 묻어가며 우물을 파도 좀처럼 물이 나오지 않았다. 물이 부족하다보니 논은 물론이려니와 밭농사의 소출도 매우 낮았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옛 천애보육원 뒤쪽에 일본인 미야사꼬가 과수원을 시작했다. 죽백동 2통 서남쪽 행금틀에는 일본인 무라사키가 과자공장을 하다가 과수재배(상공농원)를 시작했다. 일제 말에는 일본인 농원의 운영기법과 농업기술을 습득한 조선인 지주들 가운데 과수재배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비록 농업용수는 부족했지만 배수가 잘 됐던 재빼기 일대의 토질은 과수재배에 아주 적합했다. 논밭에 비해서 헐값이었던 구릉지대의 땅값도 과수재배 확산에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조성된 농원이 배다리저수지 근처의 영풍농원·태성농원, 죽백동 1통 입구의 조일농원, 방아다리 동쪽의 꽃밭재농원이다. 농원이 조성되면서 죽백동·청룡동 일대 주민들은 과수원에서 날품을 팔았다. 새끼꼬기와 가마니짜기도 생계에 큰 보탬이 되었다. 해방이 되고 1960~70년대, 정부가 소득증대사업을 독려할 때 과수재배 경험은 큰 보탬이 되었다. 주민들은 임금노동을 통해 습득한 재배기술로 재빼기 일대에 과수재배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화지구(구 소사벌지구)택지개발이 이뤄지기 전까지만 해도 4월이면 재빼기 일대에서는 서늘한 순백의 배꽃잔치가 벌어졌다. ‘배나무골’의 기원이다.
옛길은 도로교통으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콘텐츠 측면에서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시민들은 옛길을 걸으며 길 위에 남겨진 역사, 민중들의 삶의 편린들을 체험하고 공부할 수 있다. 현재 평택지역의 옛길들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이화택지지구(구 소사벌택지지구)나 용죽지구처럼 대규모 택지개발이라도 진행되면 마을 몇 개, 옛길 몇 개쯤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효용성이 떨어진 옛길에 지나친 미련을 갖는 것은 금물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거 없는 현재가 없듯이 과거 없는 미래도 없다. 과거의 문화유산, 역사적 편린들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삼남대로 재빼기 구간은 이화택지지구(구 소사벌택지지구) 사업으로 대부분 유실되었다. 이몽룡과 춘향이가 담배를 빼어 물고 풍광을 즐겼다는 전설도, 하마비가 있어 말을 타고 함부로 넘나들 수 없었다는 대문재이야기도, 평택지역 배 과수농업의 역사도 잊혀 진 이야기가 될 판이다. 땅속에서 찾아낸 도자기 파편도 복원하는 시대에 전통의 문화유산이 보존이나 활용계획 없이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늦었더라도 옛길을 공원부지로 확보하여 시민들이 산책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리일까.

 

 

▲ 배다리에서 재빼기로 오르는 초입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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