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절대 청소년들 보다
늙지 않았음을 인정하기 위해서
입력하고 변화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혹여 지난 번
거리의 소녀들처럼 방황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보다는 더 멋있게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 이원규 사무국장
한국방정환재단 경기지부
지인들과 모임이 있던 어느 날 새벽시간의 일이다. 늦게까지 이어지던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 유흥가 주변 골목에서 15세 미만으로 보이는 앳된 여자아이 두 명과 한명의 중년남성이 함께 있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욕설이 섞인 말들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적어도 이들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을 돌려 남성에게 가까이가 아이들의 부모님이 되냐고 물었고 남성은 나에게 화를 내며 아이들의 삼촌이니 상관 말고 가던 길을 가라고 욕설과 함께 소리쳤다.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성의 말을 믿지 못한 나는 경찰에 신고를 했고 출동한 경찰은 그들에게 삼촌과 조카가 맞느냐고 되물었고 “그렇다”라고 대답한 남성과 아이들의 말만 믿고 그냥 돌려보내려했다. 나는 경찰에게 명확하게 다시 조사할 것을 수차례 귀찮도록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으며 취기가 오른 남성이 길을 가던 중 가출 청소년들을 붙잡아 용돈을 줬고 함께 장소를 이동해 술을 마시자고 이야기하던 상황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아이들은 세 부류의 사람을 만났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음흉한 자기욕심을 채우려던 사람, 행색과 상황만으로 비행청소년으로 인지하고 믿어주지도, 물어보지도 않았던 불신 가득한 사람, 빨리 피곤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던 무책임한 사람이다.

물론 지금도 “내가 그 두 사람들 보다는 좀 낫지 않나?”라고 스스로 위안을 하기는 하지만 영화나 강의 중 사례에 등장하는 멋스러운 청소년 지도자들과는 거리가 좀 있는 게 사실이다. 편견으로 개입했고 아이들의 이야기는 듣지도 믿지도 않았으며 해결을 초점으로 아이들에게 윽박지르기만 했으니 멋있을 리 만무하다.

청소년들을 만나는 일을 하면서 ‘참 멋진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고 싶은 욕심이 정말 많다. 그래서 종종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는 척, 듣기 싫어도 듣는 척, 편견이 있어도 없는 척을 하며 생각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결국엔 그들보다 경험이 많고 지내온 세월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위한다는 포장을 씌우고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폄훼하거나 편견을 갖고 지적하기 시작하며 ‘어른’ 행세를 한다.

돌아보면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기술이라고 특정 지어진 매뉴얼에만 집착한 결과인 것 같다. 아이들을 잘 지도하기 위해 정답을 찾아야하니 성인들만 가득한 세미나나 워크숍만 열심히 다녔다. 다양한 교육도 받고 상담에 컨설팅까지 받았지만 정작 아이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눈을 보고 손을 잡으며 가슴깊이 교감한 적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자신 주변의 삶을 똑바로 관찰하지 않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김훈 작가의 말처럼 아이들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무책임한 짓만 해온 것이다.

이제 ‘어른’이라는 핑계로 휘두르던 편견과 지적을 거두고 싶다. 철학자 이진경 교수는 “늙는다는 것은 입력 장치는 고장 나고 출력 장치만 작동하는 상태다. 입력은 정지되고 출력만 되는 상태, 그러니 머리도 쓸 일이 없다.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출력하면 되니까”라며 늙는다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그렇다. 늙는다는 것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다. 자꾸 이른바 ‘꼰대놀음’에 빠지지 말고 난 절대 청소년들 보다 늙지 않았음을 인정하기 위해서 입력하고 변화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혹여 지난 번 거리의 소녀들처럼 방황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보다는 더 멋있게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로 늙지도 말아야 한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듣고 교감하여 시선 또한 바로 세워야 한다. 아이들에게 “참 멋진 사람”이라는 찬사를 듣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상상하며 그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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