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8월 1일

 

진위청년회 야학부 설치, 5월 개강
150명 2부로 수업, 교사 준공 축하  

 
“京畿道 振威靑年會에서는 一般無産兒童의 文盲을 退治키 爲하여 同會舘內에 지난 五月 一日부터 夜學部를 設立하였던 바, 現今 生徒가 新垈里支部를 合하여 一百五十餘名에 達한다는 바, 邇來 職員諸氏의 熱心敎授로 자못 好 成績을 得하였으나 (중략) 會長 李成烈氏의 의 意味深長한 感想談은 참으로 天眞爛漫한 어린이를 心悅케 하였으며, 이어서 來賓으로 李相勳氏의 祝辭가 끝난 後 同 十一時頃에 拍手聲裏에 無事閉會하고 이미 準備하였던 晩餐會를 열었더라”(동아일보, 1928년 8월 5일)

우리나라 교육열은 지금도 세계 최고로 알려져 있다. 성리학이 통치이념이었던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고 입신양명의 첫 걸음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일제강점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는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측면에서 식민지 관제교육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교육열이 급등하면서 전국 각지에 학교가 세워지고 야학이 개설됐다. 평택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2년 설립된 진위청년회는 교육열에 부응해 1928년 5월 5일 진청학원을 설립하고 야학부를 설치했다. 야학부는 대부분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는 학생 즉 ‘무산아동’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부정기적이었지만 해마다 5월 초에 개학했다. 1928년에는 5월 1일 야학부를 개설했는데 학생수가 신대리지부 학생을 포함, 150여 명에 달해 1부와 2부로 나눠 수업을 했다.

그렇지만 공부할 수 있는 교실이 없어서 고민이었다. 교직원들의 십시일반과 유지들의 후원으로 1928년 하반기 마침내 2부 수업도 할 수 있는 교사(校舍)가 준공됐다. 교직원들은 뜻 깊은 일을 맞아 8월 1일 저녁 9시 축하회를 겸한 기념식을 거행했다.

기념식에서는 당시 진위청년회장 이성열이 그동안의 감상을 이야기 했는데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정도로 흥미가 있었다. 이어 이상훈의 축사가 끝나고 늦은 밤 11시경에야 거나하게 준비한 만찬이 시작됐다. 바로 형설지공(螢雪之功)과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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