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탐사평택사람들의 길
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4.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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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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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고개는 송탄지역의 대표 지명이다
‘숯고개’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탄현炭峴’으로 표기되었다

 

‘숯고개’가 제법 넓은 지역의
대표 지명이 된 것은
진위현 세곡 운송의
중심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 탄현면은
일탄면과 이탄면으로 나눠졌다.
일탄면 지역은
신장동·지산동·송북동·독곡동 일대였고,
이탄면은 서탄면에 속하는
적봉리·야리·신야리·장등리였다.
이것이 1914년 행정구역 통합과정에서
이충동과 중앙동 일대의
송장면과 통합되면서
송탄松炭이 되었다.

 

 


 

6 - 진위현의 세곡과 숯이 유통되었던 숯고개

 

평택지역은 평야와 물 그리고 구릉으로 형성되었다. 예로부터 평택사람들은 구릉에 기대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키고 소통하게 하는 고리였다. 평택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만나고 소통하며 살았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을 연재한다. 고개에 얽힌 평택사람들의 삶을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송탄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숯고개와(가운데 길) 경부선 철도
   
▲ 라이온스클럽에서 숯고개에 세운 아치와 팀스피리트 참가 미군 장병 환영 간판(1981년)

■ 송탄지역의 중심은 숯고개

숯고개는 신장동과 지산동의 경계에 있다. 조선후기 삼남대로는 진위면 봉남리에서 진위목교를 건너 마산2리 소백치를 넘었다. 진위교를 건너면 갈림길이었다. 큰길은 마산2리 숲안말을 지나가는 삼남대로였고 서쪽 방향은 고덕면 해창리와 연결된 해창길이었다.

해창은 고을의 세곡稅穀을 모아서 한양까지 운반했던 조창을 말한다. 추수가 끝난 늦가을 진위고을에서는 백성들에게 세곡을 거두었다. 이렇게 거둬들인 세곡은 일부는 고을의 경비로 사용하기 위해 사창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해창으로 운반하여 한양까지 조운하였다. 그래서 추수가 끝난 늦가을이면 ‘해창길’은 세곡을 실은 마차들이 줄지어 지났고 고갯길을 넘는 길목에는 장시場市가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진위고을의 장시는 읍치邑治 봉남리에 있었던 진위읍내장이 중심이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 해창길로 대동미 운반이 많아지면서 읍치邑治에서 10리 쯤 떨어진 신장동에 새시장이 형성되었다. 새시장新場은 신장1동 구장터에 있다가 나중에 육로교통과 좀 더 가까운 숯고개 근처로 옮겨졌다. 혹자는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진위목교 건너편에 주목하지만 이것은 고산자 김정호의 착오였다. 진위목교 건너편은 조선후기 만해도 습지였고 마을이 없어서 시장이 형성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숯고개는 송탄지역의 대표 지명이다. ‘숯고개’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탄현炭峴’으로 표기되었다. 조선후기 탄현면은 처음이 5리 끝이 20리였으므로 독곡동 오리골 마을에서 신장동, 지산동, 서정동, 서탄면 적봉리·장등리 그리고 미군기지에 편입된 야리와 신야리 일대까지가 영역이었을 것이다. ‘숯고개’가 제법 넓은 지역의 대표 지명이 된 것은 진위현 세곡 운송의 중심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 탄현면은 일탄면과 이탄면으로 나눠졌다. 일탄면 지역은 신장동·지산동·송북동·독곡동 일대였고, 이탄면은 서탄면에 속하는 적봉리·야리·신야리·장등리였다. 이것이 1914년 행정구역 통합과정에서 이충동과 중앙동 일대의 송장면과 통합되면서 송탄松炭이 되었다.

 

 
   
▲ 경부선 철도를 횡단해 숯고개와 K-55 오산미공군기지를 이어주는 신장육교
   
▲ 송북시장 앞 숯고개와 신장동 기지촌으로 갈라지는 갈림길

■ 조선후기에는 쑥고개로도 불려

숯고개는 통상 ‘쑥고개’로 부른다. 필자는 쑥고개는 사투리므로 숯고개 또는 탄현으로 불러야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1911년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에 숯고개에 ‘지현(쑥고개)주막’이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는 입장을 바꿨다. 그렇다면 주민들은 100년 이전부터 숯고개가 아니라 ‘쑥고개’라고 불렀다는 말이 된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숯고개는 지역구분의 경계가 되었다. 당시 일탄면은 송장면과 통합되면서 ‘송탄면’으로 편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숯고개를 경계로 지산리와 신장리가 나눠졌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 숯고개 마루턱에서 38년째 한일펌프상회를 운영하는 차광O(1953년생) 씨를 만났다. 차 씨는 지제동이 고향이었다. 일찍이 지제동 마을조사를 했던 경험이 있어 마을이야기와 연안 차 씨 가문에 대해 아는 체를 했더니 매우 반가워하신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문이 빼꼼 열리며 이영O(1943년생) 씨가 들어온다. 이영O 씨를 보자 차 사장님은 저 분이 진짜 토박이라며 자리를 비켜준다.

이 씨는 몇 안 남은 숯고개의 진짜 토박이였다. 그의 집은 숯고개 중간쯤에 있었다. 아버지는 오일장을 돌며 장사를 했던 장돌뱅이였다. 어린 시절 이 씨 형제들은 아버지가 장사를 나갔다 돌아오실 때쯤이면 숯고개 고갯마루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렸다. 어쩌면 아버지보다 아버지가 사가지고 오셨던 고깔모자 모양의 핑크색 셈베과자가 더 기다려졌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숯고개에서 길은 서정리역 방향과 신장동을 거쳐 고덕방면으로 나가는 길로 갈라졌다. 아버지는 서정리 방면에서 오는 날이 많았다.

6.25 한국전쟁 이전 숯고개에는 11호가 살았다. 비록 11호에 불과했지만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다 보니 술도가(양조장)도 있었고 주막과 방앗간도 있었다. 단란했던 가정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덟 살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무너졌다. 전쟁이 발발하자 육사 10기생이었던 큰오빠는 계급장도 달지 못한 채 전선에 나갔다가 전사했다. 설상가상 1.4후퇴 때에는 중공군들의 폭격으로 숯고개 일대의 집들이 대부분 불타고 파괴되었다. 무너져 내린 그의 가정을 일으켜 세운 사람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신장동 남의 집 문간방에 얹혀살면서 떡장사, 국수장사를 하여 가족들이 기거할 오막살이집을 재건하였고, 나중에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미군기지에서 일하며 7남매를 키워냈다. 살아생전 어머니의 염원은 대통령감으로 믿었던 큰아들의 생사를 죽기 전에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염원을 가슴에 품고 105세까지 사셨다.

 
   
▲ 경부선 철도와 미군기지보급물자수송철로가 함께 달리는 신장육교 아래 풍경
   
▲ 숯고개 경부선 철로 옆에 남아 있는 옛 가옥들

 

■ ‘쑥고개’의 시인 박석수 그리고…

1951년 남하했던 중공군이 밀려 올라간 뒤 신장동과 야리·적봉리 일대에 미군기지가 주둔하였다. 미군기지주둔은 숯고개 일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초기 정문이었던 적봉리와 사거리 일대, 정문이 옮겨지면서 형성된 신장1동 제역동(지골) 일대에는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기지촌에는 미군 병사들이 바글거렸고 전국 각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영O 씨는 미군주둔 초기에는 흑인병사들이 많았다고 했다. 미군들은 한국 아이들을 보면 초콜릿을 던져주거나 성탄절에는 트럭에 태워 기지 내 교회로 데려가서 공연도 보여주고 연필도 1다스씩 선물로 주곤 하였다.

신장1동 제역동(지골)의 미군기지촌은 초가집과 하꼬방이 많았고 신장2동 언덕배기에는 토막집들이 많았다. 하꼬방은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판자와 박스로 지었다. 그래서 방음이 전혀 안 되었고 화재에도 취약했다. 토막집은 땅에 구덩이를 판 뒤 거적으로 바닥을 깔고 문을 해달은 모양이었다. 한 집에 방이 여러 개가 달렸던 하꼬방에는 방마다 한 세대씩 거주하였다. 어떤 집은 아이가 있는 가정집과 기지촌 여성들이 기거하는 방이 같은 집에 있었다. 오직 생존만이 최고의 선善이었던 모순의 공간, 냉전과 분단이 만들어낸 이질적 공간이 1950~60년대의 기지촌이었다.

시인이며 소설가 박석수(1949∼1996)는 기지촌의 모순을 가장 정확하게 분석하고 표현한 작가다. 숯고개 아래 좌동에서 태어난 그는 삶의 대부분을 기지촌을 중심으로 살았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쑥고개> 연작은 기지촌을 바라보는 박석수의 시각을 잘 드러낸다. 시집에서 박석수는 송탄 기지촌을 ‘한반도의 어둠을 몽땅 실어다 부려놓은 마을’이라고 표현했다. 기지촌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동거했다. 그 중에서도 냉전의 산물인 기지촌 여성은 사회의 냉대를 가슴에 삭이며 살아야 했던 가장 낮은 자들이었다.

박석수는 그들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몸은 비록 미군의 품안에서 / 달러로 길들여져 가더라도 / 가슴은 아름다운 모국어로 / 사랑을 노래한 시가 읽고 싶다고 / 그러다가 결혼해서 / 달러를 따라 마음을 등지고 / 손 흔들며 떠나던 누이야(소박-쑥고개2 일부).

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숯고개도 변해갔다. 비록 기지촌으로 들어가는 중심도로에서는 비껴났지만 고개 아래 삼거리를 중심으로 버스터미널과 병원·은행·그리고 아침시장인 송북시장·여관들이 자리를 잡았다. 1970년대 말 고개 정상부를 가로지르는 곳에 신장육교가 건설되면서부터는 변화의 바람이 더욱 거셌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기지촌 상업이 시들해지고 숯고개 아래에 있었던 터미널마저 이전하면서 숯고개의 영화도 흐릿해지고 있다.

 
   
▲ 지산동 숯고개 오르막
   
▲ 송북전통시장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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