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대로는 오룡동을 지나 신리 장호원을 지났다
오리골을 지나 한양을 오가던 맹사성이 토호들의 간청으로
오룡동길로 행로는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백치는 진위면 마산리와 은산리 일대
태봉산과 다학산 줄기를 넘는 고개다.
마을주민들은 ‘염봉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장시가 발달했을 때
소금장수들이 넘나들던
고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염봉재는 ‘소금장고개’라고도 부른다.
다른 이름이로는
장꾼들이 넘나들었다고 해서
장고개라고도 부른다.
옛날 마산리 일대 주민들은
서정리장을 갈 때면
염봉재를 넘어 작은흰치재, 동령마을
그리고 서두물을 거쳐갔다.

 

 


 

7 - 소금장수와 장돌뱅이들이 넘었던 염봉재

 

평택지역은 평야와 물 그리고 구릉으로 형성되었다. 예로부터 평택사람들은 구릉에 기대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키고 소통하게 하는 고리였다. 평택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만나고 소통하며 살았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을 연재한다. 고개에 얽힌 평택사람들의 삶을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소백치 삼남대로 옛길(아랫쪽 좁은길)과 새길(위쪽 넓은길)
▲ 태봉산 소백치(염봉재)와 마산2리와 마산3리


■ 소백치보다 염봉鹽峯이 정겨워
삼남대로 소백치 구간은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진위면 갈곶리 이방원에서 견산4리 산직촌~신리 장호원~독곡동 오리골이나 마산1리 오룡동을 거쳐 백원과 대백치로 지나는 길이 일반적이었지만, 조선후기 진위면 마산리 3리에 ‘새둑’이 축조되면서 진위면 봉남리에서 새둑거리를 거쳐 소백치(염봉재)를 넘는 직선로가 만들어졌다.

소백치는 진위면 마산리와 은산리 일대의 태봉산과 다학산 줄기를 넘는 고개다. 마을주민들은 대체로 ‘염봉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장시가 발달했을 때 소금장수들이 넘나들던 고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염봉재는 우리말로 ‘소금장고개’라고도 부른다. 옛날 소금장수는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암염巖鹽이나 자염煮鹽이 아니면 소금을 얻기가 힘들었던 시절에는 소금이 워낙 값이 비싸서 일반 상인들은 취급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름이로는 장꾼들이 넘나들었다고 해서 장고개라고도 부른다. 옛날 마산리 일대 주민들은 20리가 넘는 서정리장을 갈 때면 염봉재를 넘어 작은흰치재, 동령마을 그리고 서두물을 거쳐갔다.

염봉재를 오르는 길은 마산2리 수촌에서 시작된다. 수촌마을은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숲이 우거져 숲안말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경주 이 씨 상서공파가 세거하였다. 경주 이 씨 상서공파는 이성무와 이항복의 후손으로 무봉산 일대의 가곡리·봉남리·동천리·송북동 동막마을 일대에 분포하였는데, 가곡리와 봉남3리 일대의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많이 흩어졌고, 나머지 마을들도 서울이나 대도시로 이거한 사람이 많아서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진위면 일대 경주 이 씨의 뿌리는 수촌마을 서쪽 산자락의 거먹비 산소다. 거먹비 산소는 백사 이항복의 증조부였던 안동판관 이성무의 묘갈을 말한다. 묘갈은 본래 실전되었던 것을  후대에 땅 속에서 찾았는데 재질이 검은 대리석이어서 거먹비·거먹비산소로 부르게 되었다. 경주 이 씨는 이항복 이래 조선후기 최고 명문가로서 맹위를 떨쳤다. 재상을 지낸 인물만도 이광좌·이태좌·이종성 등 십여 명에 달하며 판서·대제학까지 포함하면 이루 셀 수가 없다. 경주 이 씨가 우리역사에서 갖는 최고의 가치는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겼을 때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여 진정한 삼한갑족의 명예를 드높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덕분에 해방 후 가문이 피폐했지만 아직도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이종걸 의원 같은 후손들이 정계에서 조상들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며 활약하고 있다.

 

▲ 삼남대로 진위면 마산2리 숲안말 구간
▲ 진위면 마산2리 수촌 앞을 지나는 삼남대로

 

■ 백현원이 부락산에 있었다고?
진위면 마산2리 수촌 앞을 가로질러 산등성이를 비스듬히 오르면 염봉재다. 염봉재 산등성이를 따라 3분의 1쯤 오르면 마산1리 오룡동과 백현원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삼남대로는 오룡동과 오리골 앞을 지나 진위면 신리의 장호원을 지났다. 세종 때의 명재상 맹사성의 고사에도 오리골을 지나 한양을 오가던 맹사성이 토호들의 간청으로 오룡동길로 행로는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룡동은 조선 초 단양 우 씨들이 개척했다고 전한다. 마을이름은 오룡五龍이 승천한 명당이 있다고 하여 유래되었는데, 수촌 단양 우 씨 묘역과 경주 이 씨 묘역, 안골 광주 이 씨 묘역과 순흥 안 씨 묘역, 수촌 이성무의 묘(거먹비 산소)가 그것이다. 오룡五龍 외에도 태봉산과 다학산 자락에는 능선을 넘나드는 고개와 골짜기들이 많다. 오룡동 뒤편 다학산 아래 능말내, 다학산 옆 산꼭대기의 물보는말랭이, 서정리장을 보러 넘나들던 장보고니 고개가 그것이다. 이밖에도 마산2리 수촌으로 넘어가다 삼남대로와 만나는 건너말고개, 건너말고개를 넘어가는 산악골도 오룡동의 주요 골짜기다.

오룡동에서 건너말고개를 넘어 삼남대로를 따라 장보고니로 내려서면 백현원이 있었다. 백현원은 조선시대 평택지역 8개 역원驛院 가운데 하나로 북쪽으로 진위면 신리의 장호원, 남쪽으로는 송탄동 칠원1통의 갈원과 연결되었다. 백현원은 고불 맹사성의 ‘공당문답’으로 유명하다. 삼남대로를 따라 고향 아산을 자주 오갔던 맹사성이 어느 날 백현원에 들렀다가 버릇없는 젊은 녹사와 나누었다는 공당문답은 그 후 널리 알려져 한 때는 초등학생들의 단골 이야기꺼리가 되었다. 근래 지역학술대회에서 태봉산 소백치(염봉재) 아래에 있었던 백현원을 ‘부락산 백현원’이라고 주장하여 실소한 적이 있다. 어쩌면 백현원이 송탄지역에 있었다고 하니까 고증도 없이 부락산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것 같은데 신중한 태도가 요구된다.

 

 

▲ 백현원으로 올라 가는 염봉재 옛길
▲ 태봉산 소백치(염봉재)

■ 삼남길 확장사업이 오히려 옛길을 살려
염봉재 남쪽은 동막과 소골이다. 동막은 동쪽 막다른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일찍부터 경주 이 씨가 대성大姓을 이뤘다. 옛날에는 첩첩이 둘러싸인 산골짜기 마을이어서 교통이 매우 불편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더구나 근대 이후 삼남대로가 기능을 상실하고 해방 후 송탄이 발달하면서부터는 중심에서 소외되었다. 그래서 송탄시내로 나가려면 좁고 미끄러운 지산천 둑방길을 따라갔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둑이 무너져 그마져도 갈수 없었다.

해방 전후 동막사람들은 오산장과 서정리장을 봤다. 오산장을 갈 때는 삼남대로를 따라 염봉재와 진위천을 건넜다. 10리가 떨어진 서정리장은 큰 흰치고개 정상에서 작은흰치재를 넘어 다녔다. 장날이면 동막사람들은 지게에 곡물이나 잡곡을 이고 지고 다녔다. 1960~70년대 벼 매상을 했을 때도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지게에 지고 날랐다. 마차길이 조성된 것은 새마을운동 때다. 새마을사업으로 둑방길을 넓히는 도로가 건설되고 끊어진 길이 이어지면서부터 서정리장을 오가기가 많이 편해졌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학교는 진위초등학교를 다녔다. 서정리초등학교는 10리 밖이었던 데 비해 진위초등학교는 염봉재를 넘어야 했지만 5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해방 후 학구개편에 따라 서정리초등학교를 다녔고 그 뒤에 지산동 건지미에 송북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는 송북초등학교로 다녔다. 주민 김현O(1932년생) 씨는 그래서 동막에서는 어느 학교 나왔냐고 묻기만 하면 나이를 알 수 있다며 웃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동막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했다. 마을 뒤편으로 다랭이 논들이 있었지만 천수답이어서 소출이 적었다. 메말라서 관정을 박아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은 용인 이동저수지 물과 동막저수지가 축조되면서다. 겨울을 넘길 식량이 부족했던 농가들은 나무장수를 하거나 숯가마에서 일했다. 태봉산과 덕암산 북사면에는 참나무가 많이 자랐다. 그래서 숯가마 사업을 하던 사람들은 늦가을에 산 주인에게서 나무를 매입한 뒤 숯가마를 지어놓고 겨우내 숯을 구웠다. 그런 숯가마가 겨울이면 서너 개가 넘었다. 이렇게 구운 숯과 장작은 오산장이나 서정리장에서 매매되었다. 그렇게 연명하며 살았다.

잊혀져가던 삼남대로가 확장된 것은 14~15년 전이다. 당시 평택시는 삼남대로 복원을 통한 남북지역 소통을 명분 삼아 4차선 도로확장을 단행했다. 하지만 정확한 고증을 통한 문화적 복원보다는 편리성과 경제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옛길보다는 세련된 현대식 도로의 면모만 도드라지게 되었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삼남대로 염봉재 구간은 개발의 폭풍 속에서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옛길은 2013년 경기도의 삼남길 복원사업 때 요긴하게 사용되어 진위고을길 가곡리 구간과 함께 삼남로 평택구간의 대표 탐방구간으로 자리 잡았다. 무지함이 오히려 약이 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소백치와 대백치 사이의 동막마을과 동막저수지
▲ 삼남대로 우곡점 옆을 지나 대백치로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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