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0월 16일

 

 

10월 16일 창립대회, 3~400명 출석
진위·안성 무산대중 중심으로 결성 

  “진위 안성(振威 安城) 양군에 무산대중을 중심으로 하고 일구(一口) 오십 전으로 최고 십구 전까지 하여 오래전부터 발기하여 오던 진안협동조합은 예정과 같이 지난 16일 오후 두시에 본 조합 임시사무소에서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출석한 회원 삼사백 명으로 창립대회 발기에 노력하던 안충수(安忠洙) 씨 사회로 열고 우의 단체 진위청년동맹(振威靑年同盟)과 조선노총서정리청년동맹(朝鮮勞總西井里同盟)에서 보낸 축문 등의 낭독이 있은 후 회원 심사와 임시의장 안충수(安忠洙) 씨를 선거한 후 위원 선거는 전형위원 삼씨로서 다음과 같이 선거하고 여러 가지 중요사항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후 다섯 시 반에 만세삼창으로 폐회하였다 한다(하락)” (조선일보, 1930년 10월 21일자)

협동조합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소외돼 있는 사람들이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한데 모아 스스로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든 경제조직이다. 협동조합의 기원은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됐고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에 전래됐다. 평택에도 강점기이지만 1930년 10월 16일 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진안협동조합은 진위군과 안성군의 무산농민이 중심이 돼 결성됐다. 1구에 50전으로 조합원을 모집했는데 조합원이 800명에 달했다. 1930년 10월 16일 오후 2시 진위군 병남면 비전리 493번지에서 300~4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이날 임원진을 선출했는데 집행위원장은 안충수(安忠洙), 서기장 오일영(吳一泳), 회계부주임 이기동(李基東), 생산부주임 유부산(兪富山), 소비조합부주임 전갑순(全甲順), 신용부주임 강공운(姜公云)이었다.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된 안충수는 3·1운동에 참여한 바 있으며 1931년부터 36년까지 동아일보 평택지국장으로 활동한 유지였다. 1933년 12월 15일과 16일 <동아일보>에 ‘동계휴식기에 이용할 과수의 전정’, 1934년 1월 14일부터 3회의 ‘동계의 야채원예’, 1월 18일부터 5회의 ‘동계의 과수원예’를 연재하기도 했다.

한편 1933년 5월 25일 안충수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현금·양복·시계 등 200원을 훔쳐 달아났다. 당시 평택에는 도난사건이 적지 않았는데 안충수의 집도 털린 것이다. 경찰은 도둑을 잡기 위해 혈안이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