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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학특별기획 - 평택사람들의 길 <4.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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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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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재 너머 마을 서재는 상서재와 하서재로 나뉜다
상서재에서 당재 구간에는 기다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싯굴·먹골·성너머·한작골과 같은 골짜기가 발달했다

 

하서재는 통복천과 함께 살아왔다.
평택에서 하천 변 삶은
득得보다 실失이 많다.
조선후기 충청수영로는
하서재에서 둑방을 따라
서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통복교에서 하천을 건넜지만
삶이라는 것이 한 방향으로만
다닐 수는 없다.
하서재에서 통복천을 건너
성환이나 안성방향으로 가려면
마을 앞에서 내를 건너야 했다.
해방 전후 하서재 앞에는
널다리가 있었다.

 

 


 

8 - 삼남대로와 충청수영로의 갈림길 동삭동 당재

 

평택지역은 평야와 물 그리고 구릉으로 형성되었다. 예로부터 평택사람들은 구릉에 기대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키고 소통하게 하는 고리였다. 평택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만나고 소통하며 살았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을 연재한다. 고개에 얽힌 평택사람들의 삶을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동삭동 당재를 중심으로 아래는 상서재, 위로는 동삭현대아파트, 왼쪽으로는 모산골저수지, 오른쪽으로는 동삭2지구 자이아파트 건설현장이 위치해있다.
   
▲ 동삭동 모산골저수지와 배 과수원 지대

■ 충청대로의 갈림길이었던 당재
옛길은 지형변화와 함께 크게 변화했다. 조선후기 평택지역의 지형변화를 주도한 것은 간척이다. 팽성읍 평궁리와 추팔리 일대의 통한들이 간척되기 전 충청수영로(한양-충남 보령)는 유천동 건너편의 성환읍 안궁리 가룡마을에서 갈라졌다. 그러다가 조선후기 추팔리, 평궁리 일대의 통한들이 간척되면서 군물포에서 배를 타고 석봉리 원봉나루로 건너거나 신궁리 뱃터로 건너가는 새로운 교통망이 형성되었다.
군물포와 연결된 새 길은 주로 사람들이 오갔다. 나룻배에 싣기 힘들었던 가마나 임금의 온양행궁 행차는 목교木橋가 있었던 소사동을 지나 안성천 아교(애구다리)를 건넜다. 칠원1통 갈원에서 군물포로 나가려면 동삭동 당재를 넘어야 했다. 당재는 동삭현대아파트를 지나 동삭동 서재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다. 당재 고갯마루에는 서재마을의 산신당이 있다. 당재라는 지명유래가 다 그렇지만 동삭동 당재도 고갯마루에 산신당이 있어서 유래되었다.
19세기에 편찬된 <진위현 고지도>에 보면 칠원1통 갈원에서 당재를 넘어서면 동삭동 서재마을이었다. 서재는 근대 이후 상서재와 하서재로 나눠졌다. 근처의 칠원2통 새말이나 3통 수촌 사람들도 평택장이나 세교동 중앙초등학교를 오갈 때면 당재를 넘어 다녔다. 당재를 넘어 하서재에서 둑방을 따라 내려가면 통복천이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통복천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징검다리는 나름 유용한 교통수단이었지만 하천의 수위 변화에 따라 교통이 방해받았다. 조선후기 하서재 아래쪽에 쇠머리보가 축조되었다. 기록대로라면 통복동 근처에도 통복보가 있었을 것이다. 보洑가 축조되면서 징검다리는 한결 편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해방 후에는 나무전봇대를 걸쳐 놓은 통나무다리가 놓였다. 통나무다리는 조악했지만 징검다리에 비해서는 훨씬 편리했다.
조선후기 통복동에서 군물포(군문동)로 가는 길목에 통복점이라는 주막이 생겼다. 주막의 위치는 정확치 않지만 대체로 철둑너머 삼성아파트 근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칠원1통 갈원에서 통복점까지는 10리길. 그래서 충청도 내포지역으로 내려가는 길손들은 통복점에서 다리쉼을 했다. 1905년 경부선 평택역이 개통하면서는 평택역(현 서부역) 앞을 지나는 국도 1호선, 38호선, 45호선이 건설되었다. 통복동 통복지하도 건너편은 국도 1호선과 38호선의 갈림길이어서 인마人馬의 통행이 잦아 삼거리주막이 생겼다. 어쩌면 삼거리주막은 과거 통복점이었을지도 모른다. 봉건사회나 근대인들이나 먹고 마시는 위치는 비슷했을 테니까.

 

 

   
▲ 동삭동 당재에서 상서재와 수촌방향으로 나가는 길
   
▲ 동삭2지구 자이아파트 개발에 포함된 서재마을 산신당

■ 아파트 택지개발 안에 감금된 신神
당재 너머 마을 서재는 상서재와 하서재로 나뉜다. 당재 남쪽기슭이 상서재, 하천 변에 하서재가 있었다. 서재자이아파트로 개발되기 전 상서재는 약 60여 호, 하서재는 40호였다. 마을은 상서재가 먼저고 나중에 하서재가 만들어졌다. 하서재처럼 하천 변 마을은 각성바지가 많고 밭농사보다는 논농사를 많이 짖는다. 하서재는 전통적으로 식수가 부족했다. 한 때는 우물이 없어 냇물도 먹었다. 홍수도 잦았다. 주민들은 하도 홍수가 자주 발생해서 장마철만 되면 굵어진 빗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상서재에서 당재를 넘는 구간에는 기다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싯굴·먹골·성너머·한작골과 같은 크고 작은 골짜기가 발달했다. 구릉지대에는 본래 밭농사와 양계장이 있었지만 1970~80년대를 거치며 과수재배가 성행했다. 그래서 배꽃이 만개하는 4월이면 온 산이 순백으로 뒤덮였다. 당재 초입인 동삭현대아파트에서 19년을 살았던 필자는 보름달 휘영청 밝은 봄밤 서늘하게 빛나던 배꽃의 향연을 잊지 못한다. 당재 서쪽 모산골저수지에서 올려다봤던 풍경도 절경이었다.
당재의 상징은 산신당이다. 서재 산신당은 산신과 서낭신을 모두 섬기는 것이 특징이다. 산신당의 위치가 당재의 중간쯤이고 서재마을 초입이다 보니 기존의 산신제에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신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제향도 음력 섣달그믐과 유월 그믐 두 번씩 지냈다. 그러다가 근래로 오면서 정월 초사흘로 통합되었다. 마을제는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발복을 기원하는 공동제의다. 그래서 깨끗한 사람으로 제주를 뽑고 쌀이나 돈을 거둬 제물을 준비하였다. 제일祭日을 앞두고 한 해 동안 쌓인 감정을 풀고 화해하는 정결행위도 하였다. 신성했던 산신제는 서재마을이 서재지구택지개발로 폐동廢洞되고 상당 수 주민들이 흩어진 지금도 유지되지만 앞날은 예측할 수는 없다. 최근에는 동삭2지구 자이아파트 택지개발로 산신당마저 개발지역 안에 갇혀버려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주민들은 설마 산신당까지 밀어버리겠냐고 애써 위안했지만 그건 자본의 논리를 모르고 하는 말일 것이다.

 

 

   
▲ 동삭동 모산골저수지와 배밭
   
▲ 동삭동 모산골저수지의 일출

■ 개발은 결코 발전이 아니라는 사실
하서재는 통복천과 함께 살아왔다. 평택에서 하천 변 삶은 득得보다 실失이 많다. 조선후기 충청수영로는 하서재에서 둑방을 따라 서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통복교에서 하천을 건넜지만 삶이라는 것이 한 방향으로만 다닐 수는 없다. 하서재에서 통복천을 건너 성환이나 안성방향으로 가려면 마을 앞에서 내를 건너야 했다. 해방 전후 하서재 앞에는 널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널다리는 중심이 약해서 장마나 8월 백중사리에 바닷물이 밀려들면 견디지 못했다. 다리복구는 마을공동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주민들은 가을 추수 때 곡식을 모으거나 음력 정월에 걸립을 해서 다리를 복구했다. 1960년대에는 부산 영도다리처럼 개폐식 다리를 놓았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 새마을사업으로 시멘트가 지급됐을 때 가장 먼저 통복천에 토관을 묻고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다.
물이 흔한 마을이었지만 식수나 농업용수는 귀했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안성시 원곡면 근처까지 바닷물이 유입됐던 통복천은 자주 범람해 수해와 염해를 끼쳤다. 그래서 상서재에는 싯굴방죽이 있었고 하서재 근처에는 쇠머리보洑가 축조되었다. 하서재는 6.25 한국전쟁 전까지 공동우물도 먹었지만 대부분 통복천 냇물을 먹었다. 공동우물은 가뭄에 자주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서재 주민들은 산신제를 지낸 뒤 정월에 좋은 날을 잡아 통복천에 용신제를 따로 지냈다. 용신제는 산신제와 다른 금기가 있었다. 제일祭日이 잡혔을 때 생선을 잡거나 칼도마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천 변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장마철이면 범람하는 하천과 싸워가며 살아왔던 서재와 당재고개 일대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다. 당재 초입에 동삭현대아파트가 건설되더니 동삭로 건너편으로 삼익사이버아파트와 대우이안아파트가 건설되었다. 2003년에는 한작골에 동삭초등학교가 들어섰고, 2010년 전후 전통의 서재마을까지 개발로 사라졌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개발을 희망했다고 한다. 낡은 마을 낡은 옛집을 헐어버리고 강남의 부촌들처럼 아름다운 2층 3층짜리 양옥이 들어선 최신식 새 동네를 꿈꾸었다. 하지만 자본資本은 그렇게 순진한 얼굴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전원주택을 꿈꾸었던 터에 원룸을 지었고 일부 주민들은 배당받은 대토를 처분하고 마을을 떠났다. 마을 개발을 하면서도 당재 산신제만큼은 지켜내겠다던 주민들의 의지도 언제까지 유지될지 예측할 수 없다. 당재는 지금 자본에 의해 붕괴되는 아픈 기억의 현장이다.

 

 

   
▲ 동삭초등학교와 동삭현대아파트
   
▲ 동삭2지구 자이아파트 개발지역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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