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지역에는 아리랑고개가 있다
팽성읍 본정2리 이름도 그렇고, 함정1리로 오르는 고갯길
비전동 재랭이고개도 아리랑고개라고 불렸던 적이 있다

 

기지촌은 처음에는
함정리와 도두리 부근의
민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1960년대 초쯤에는
기지 후문 둥글재라고 불렀던
‘아리랑고개’로 옮겨왔다.
아리랑고개에 미군 상대 술집과
한국인들을 위한 식당,
선술집이 생겨나면서
기지촌 여성들이 몰려들었다.
주민들은 1950년대 중반
아리랑고개 일대에만
1백 명 이상의 기지촌여성들이
미군들을 상대했다고 말한다.

 

 

▲ 팽성읍 본정리와 신대리 전경
▲ 미군기지확장 반대운동 촛불집회가 시작된 팽성농협 본정지점 삼거리


 

10 - 기지촌의 희망과 아픔 아리랑고개

 

평택지역은 평야와 물 그리고 구릉으로 형성되었다. 예로부터 평택사람들은 구릉에 기대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키고 소통하게 하는 고리였다. 평택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만나고 소통하며 살았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고개,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현장’을 연재한다. 고개에 얽힌 평택사람들의 삶을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변해가는 본정2리 아리랑고개 기지촌
▲ 본정2리 아리랑고개 골목길
■ ‘아리랑고개’는 영화가 만든 창작물
‘아리랑고개’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본래는 정릉고개였지만 1926년 춘사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촬영하면서 ‘아리랑고개’로 바뀌었다. 1935년경 ‘청수관’이라는 고급 요정이 들어설 때 홍보를 위해 ‘아리랑고개’ 푯말을 세우면서부터는 기존의 정릉고개를 밀어내고 대표지명이 되었다. 
‘아리랑고개’는 나라 잃은 한恨과 눈물의 고개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도 민족의 한과 눈물이 담겨 있다.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미쳐버린 주인공 영진이 자신의 여동생 영희를 겁탈하는 일본놈의 앞잡이 오기호를 낫으로 찍어 죽이고는 일경에 잡혀 넘어갔던 고개가 아리랑고개였기 때문이다. 1926년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했던 영화 아리랑은 선풍적 인기몰이를 하였다. 전회 매진되는 것은 물론 영화가 끝난 뒤에 감격에 겨워 목 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 등 반응도 다양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아리랑고개’가 무척 많다. 재미있는 것은 ‘아리랑고개’가 보통명사로 인식되면서 정릉고개처럼 가파른 고개보다는 낮고 길며 구불구불한 고개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를 거쳐 형용사로 변질되는 언어발전 과정의 단면이다.
평택지역에도 아리랑고개가 있다. 팽성읍 본정2리 마을이름도 그렇고, 함정1리로 오르는 고갯길 그리고 옛날에는 비전동의 재랭이고개도 아리랑고개라고 불렸던 적이 있다. 평택지역의 아리랑고개도 영화 아리랑에 나오는 가파른 고갯길이 아닌 낮고 구불구불한 구릉이다. 동네사람들의 기억 속에나 남아 있었을 아리랑고개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것은 미군기지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안정리와 함정리 일대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기지 정문과 후문에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기지촌에는 미군들이나 기지촌에 근무하는 군속과 노무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질적 상업도시가 형성되었다. K-6 미군기지의 후문이 있었던 본정2리에도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기지촌이 형성된 곳은 함정리 선말고개 넘어 낮고 구불구불한 구릉 아래쪽이었다. 토착주민들은 이 마을을 ‘아리랑고개’라고 불렀다. 지형적 특징과 기지촌의 이질성이 결합된 지명인 셈이다. 호기심은 발동하는데 접근하기는 부끄러운 그런 고유명사였다.

▲ 본정2리 아리랑고개
▲ 아리랑고개 본정삼거리 풍경
■ 아리랑고개의 한恨은 누가 만들었을까?
한국전쟁 시기 미군은 혐오스럽고 무서운 존재였다. 우선 생김새와 언어가 달랐고 흑인 병사들의 피부색은 가까이하기에 부담스러웠다. 주둔 초기 본정2리 아리랑고개 후문으로는 미군 병사들과 한국인 노무자, 군속들이 함께 드나들었다. 초기 미군들은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낮았다. 규율도 잡혀 있지 않아 쓰레기도 함부로 버렸고 곳곳에서는 미군범죄도 기승을 부렸다. 무기를 소지하고 나와서는 가축들을 총으로 쏴서 잡아먹기도 했으며 한국인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도 빈번했다. 그래서 미군들이 나온다고 하면 여성들은 숨기 바빴고 대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끈 채 숨죽여 있었다. 함정리에서는 결혼한 신랑을 매달아 놓고 일명 ‘신랑매달기’를 하다가 미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한 일도 발생했다.
기지촌은 처음에는 함정리와 도두리 부근의 민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1960년대 초쯤에는 기지 후문 본래 둥글재라고 불렀던 ‘아리랑고개’로 옮겨왔다. 아리랑고개 일대에 미군 상대 술집과 한국인들을 위한 식당, 선술집이 생겨나면서 기지촌 여성들이 몰려들었다. 주민들은 1950년대 중반 아리랑고개 일대에만 대략 1백 명 이상의 기지촌여성들이 미군들을 상대했다고 말한다. 기지촌 여성들은 본정2리나 함정1리 마을에 방을 얻어 살면서 미군을 접대하거나 동거하였다. 미군상대 접대업이 잘 되자 토착주민들 가운데는 칸막이 방 십 수개씩을 지어서 월세를 받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오직 돈만 벌기 위해 급조된 방들은 조악하기 그지없었지만 침대생활에 익숙한 미군들을 위해 미군기지에서 반출된 각목과 고무줄로 만든 침대도 구비하였고 예쁜 거울이나 화장품도 있었다. 이렇게 생활하다보니 어떤 집에는 기지촌 여성 15명이 집단 거주하기도 했고, 어떤 집은 동네주민들과 아이 딸린 가족, 상인들, 기지촌 여성들이 같은 집에 기거하기도 했다. 일찍 남편을 사별하고 아이 둘을 데리고 살았던 함정리의 어느 여성은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언례처럼 호구책이 마땅치 않자 자신의 집에서 미군상대 접대행위를 하여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 일본군 비행장 부지에 포함되었다가 해방 후 복구된 함정1리 서원말
▲ 헐리고 있는 아리랑고개 옛 집들
■ 아직도 ‘아리랑고개’는 선몽善夢일까?
기지촌의 발달은 본정2리는 물론 두정2리·함정1리·도두1리 주민들의 삶에도 큰 변화를 끼쳤다. 토착주민들만 살았던 마을에 외부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공동체 질서와 공동체 윤리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본래는 불과 30호 남짓이었던 마을이 기지촌으로 발달하면서 200호를 상회하기도 했다. 외부인들이 정착하고 마을 안까지 미군들이 드나들면서 주민들은 풍기문란을 걱정해야만 했다. 청년들은 일할 생각은 안하고 미군기지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접객업소에서 노는 것을 즐겼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누구 네는 어떤 일을 당했고 누구는 돈을 얼마 벌었다는 이야기가 횡횡했고, 곳곳에서는 상인들끼리 이해관계가 얽혀 소리 지르고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보다 못한 마을 원로들과 마을 대표인 구장들은 K-6 캠프험프리즈 기지사령관에게 미군 출입을 자제해달라는 진정서를 냈다. 다행스럽게도 주민들의 절박한 요청이 받아들여져 향후 아리랑고개 후문으로는 미군 출입이 중단되었다. 미군들이 출입하지 않자 생업을 잃은 기지촌 여성들도 안정리 농성 뒤쪽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본정2리 후문으로 미군 출입이 통제되면서 아리랑고개 주변은 한국인들 거리가 되었다. 술집과 식당도 모두 한국인들만 상대했다. 아리랑고개로 모여든 한국인들은 KSC에 소속된 미군기지 노무자들과 미군 헌병들, 부대 내 술집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때로 토착민들 중에 연줄을 이용해서 미군기지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 이들이 미군기지에 다니는 것은 오직 돈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돈을 버는 방법은 매우 다양했다. 대부분은 고정 월급을 받았지만 실제로 돈을 벌어준 것은 미군기지에서 불법 반출한 다양한 술이나 식료품, 각종 자재들이었다. 심지어 그 시절에는 화장실 변기 뚜껑만 가지고 나와도 돈이 된다고 말했다. 미군기지 물건 불법 반출의 일등공신은 여성들이 입는 한복이었다. 한복은 치마통이 넓어서 몸속에 감출 것이 많았다. 미군기지에 40년 넘게 근무했다는 본정2리의 여성은 캔맥주 40개쯤은 거뜬히 치마 속에 숨겨 나올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 햄과 소세지·귤이나 복숭아 통조림도 주요 반출품이었다. 이렇게 반출된 물품은 아리랑고개에서 한국인들에게 거래되었다.
1950~60년대 전국 각 지역의 빈농·빈민들에게 선몽善夢을 꾸게 했던 아리랑고개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쇠락했다. 아리랑고개의 쇠퇴는 기지촌 상업의 쇠퇴와 한국의 경제성장, 그리고 한국민들의 의식변화가 원인이었다. 귀한 대접을 받았던 달러도 점점 과거의 위력을 잃어갔다. 유목민처럼 찾아든 아리랑고개가 희망이 없는 거리로 바뀌면서 주민들은 또 다시 짐을 꾸리고 있다. 짐을 꾸리는 그들의 뒤쪽으로 기지촌의 희망을 쫓아 외부인들이 정착할 기회를 노린다. 그들의 희망도 미군기지 확장이다. 미군기지가 확장되고 이전사업이 마무리되면 옛 영화가 다시 찾아올 것이라 믿는 부류다. 하지만 변화된 세상은 아직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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