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7월 6일

순사가 허락 없이 남의 술안주 먹어
주재소 차원에서 사건 축소하고 왜곡

 
“지난 六일 평택역(平澤驛) 전 음봉양조장(蔭鳳釀造場)에서는 노동자가 사서 먹은 술안주를 순사가 무례하게 집어 먹은 것이 발단되어 순사가 노동자를 기잡도록 구타한 후 무조건으로 묶어가지고 간 사건이 있었다. (중략) 이에 대하여 문제의 가해 순사 조씨는 말하되, 세상에는 별별 소리가 많은 듯 하나 사실은 세 개쯤 밖에 때리지 않았오. 그렇게 중상까지는 때릴 리가 있겠습니까? 자세한 것은 본서에 물어주시오. 나는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고 더 말할 수 없오”(동아일보, 1934년 7월 22일자)

일전에 ‘갑질’과 관련된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다룬 적이 있다. 갑질은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공복이라고 하는 관(官)에 의해서도 적지 않게 자행되고 있다. 일제강점기는 더욱 그러한 비정상적인 사회였다.

일제강점기 ‘순사’의 위력은 대단했다. 식민지 헌병은 식민지 조선인의 생사여탈권까지 가졌다고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3·1만세운동 이후 헌병을 대신해 순사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울다가도 ‘순사가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칠 정도였다고 할 정도로 만행이 심했다. 이러한 순사의 비인간적 만행이 평택역 앞에서 일어났다.

1933년 7월 6일 일본인이 경영하는 응봉양조장에서 박영래라는 노동자가 안주를 사서 술을 먹고 있는데 안성군 가천주재소 조개천이라는 순사가 경관 김 모와 같이 말도 하지 않고 그 안주를 먹고 가버렸다. 이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난 박영래는 자전거로 쫓아가 경찰서에 가서 잘잘못을 따져보자고 했다. 이에 조개천 순사는 경관 김 씨와 함께 자전거 줄로 박영래를 결박해 놓고 1정 가량 끌고 갔다. 박영래는 입과 코로 피가 흘렀고 절도(絕倒)까지 했다. 박영래가 정신을 차리자 주재소까지 끌고 갔고 가는 동안 박영래는 옷에 오줌과 똥을 쌀 정도였다. 이에 양조장 주인이 박영래 치료를 위해 주재소를 찾아가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면 풀어주겠다고 했다. 이를 거절하자 박영래는 결국 안성유치장에 수감됐다.

이와 같은 사건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게 되자 구타는 사실이었지만 크게 염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사건을 축소했다. 그리고 가해자 조개천 순사도 세 대 밖에 때리지 않았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리고 축소된 사건을 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고 정당화했다.

예나 지금이나 관에서는 사실을 공개하기보다는 축소 왜곡하는 것이 일상사이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도 이와 비슷한 행태가 아닌가 한다. 당당하게 추진하지 못하는 속사정을 그 누가 알아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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