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평동은 일제식민지시기에 만들어진 근대도시다.
경부선 철도건설을 맡은 일제는 향후에 있을
식민지배와 수탈을 염두에 두고 철도역을 선정했다

 

평택역전에 평택장이 개장한 것은
1910년대 초부터다.
평택장은 본정통 평화병원
우측으로 형성되었다.
평택장의 대표적 거래품목은
평택평야의 쌀이었다.
1913년 경기도 기록에도
평택장의 미곡상은 15명이 넘었다.
많아야 5명 아니면 한두 명에 불과했던
다른 품목의 상인들과는 대비되는 숫자다.
미곡과 함께 거래량이 많았던 것은
소금과 해산물이었다.
미곡이 거래되었던 골목을
‘싸전골목’이라고 했다.

  

1 - 일제침략과 근대도시의 흔적이 서린 원평동 골목길

 

이촌향도하였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터였던 골목길. 누구에게는 문학이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었으며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했던 그 길을 따라 함께 기억여행을 떠난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9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도시의 골목길’을 연재한다. 도시의 골목길을 통해 평택사람들의 삶을 따라가보자. - 편집자 주 -

 

▲ 평택초등학교 상공에서 본 원평동 시가지와 평택 서부역

■ 국도1호선은 평택지역 간선도로 1호
원평동은 일제식민지시기에 만들어진 근대도시다. 경부선 철도건설을 맡은 일제는 향후에 있을 식민지배와 수탈을 염두에 두고 철도역을 선정했다. 철도건설 이전 평택의 중심은 단연 진위면 봉남리였다. 팽성읍 객사리도 구 시가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에게 조선인들의 정서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철도와 철도역은 대륙침략과 식민지수탈의 도구였을 뿐이다.
철도역이 설치되고 1910년대 초부터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시가지는 철도역 앞으로 난 십자형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국도 1호선은 평택지역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간선도로였다. 국도 1호선은 철도역 앞 좌우로 달렸고 십자방향으로는 국도 45호선이 곧게 뻗어 있었다. 국도 1호선은 1등 도로였다. 일제 말 평택역 앞에는 차부로 불린 정거장이 있었고 일등도로에는 목탄버스가 운행되었다. 목탄버스는 안성·온양(둔포)·안중을 오갔다. 1등도로 좌우에는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일본인 상점들이 자리했다. 공공기관으로는 평택역과 함께 평택읍사무소, 우체국이 있었고, 조선상업은행(구 한성공동창고)과 금융조합이 마주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평택역전에서 살았던 김이O(1929년생) 씨는 1등 도로 변에 있었던 ‘야마히 쇼땡’이라는 일본과자점을 잊지 못했다. 군것질꺼리가 귀했던 시절 달콤한 일본과자는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평택역 광장은 근동에서 보기 드물게 넓어, 1920~30년대에는 각종 집회가 열렸고 청소년들의 야구시합이나 초등학생 종합운동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역 광장 북서쪽 철로 옆에는 용잔이라는 공터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철도건설에서 쓰고 남은 땅들로 일제강점기 원평동(구 평택리)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 원평동 평택역(서부역)과 시가지
▲ 일제강점기 1등 도로였던 국도 1호선
■ 본정통, 일제침략이 낳은 사생아
평택역에서 남서쪽으로 곧게 뻗은 국도 45호선 도로변은 일본인 거리였다. 이 거리를 ‘본정통(혼마찌)’이라고 불렀다. 본정통에는 일본인 주택과 상점, 여관과 병원, 백화점이 뒤섞여 있었다. 어린 시절을 본정통에서 보낸 김동O(1934년생) 씨는 일제 말 본정통 골목을 소상히 기억했다. 김 씨는 평택역에서 평화병원까지가 일본인 거리였고 그 아래로는 조선인 상가와 거주지였다고 말했다. 또 본정통 입구에는 우편소가 있었으며, 그 옆으로 일본인 잡화점 몇 집, 양품점·일본요리집·중국집·다방·금택여관·화신백화점이 줄지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이O 씨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화신백화점에 실을 사러 갔던 기억과 일본인 잡화점을 ‘사카이 판점’이라고 불렀던 것, 그리고 평화병원 옆에 있었던 공주여관, 대성여관(대성관), 규모가 컸던 길 건너편의 새우젓 가게를 기억했다. 군문동 쪽 둑방 너머에 있었던 윤씨네 방앗간과 해방 후 본정통 끄트머리에 있었던 방학소주공장, 삼성아파트 옆에 있었던 진청학원도 기억속의 풍경이었다. 본정통 곡물회관은 진청학원장이며 일제 말 도의원과 곡자재조합장을 지낸 이민훤 씨 소유였다. 이 건물은 규모가 커서 해방 전후 주요 행사장으로 사용되었다.
사람들의 기억은 서로 다르다. 그것은 기억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을 보는 관점, 잊고 싶은 것들에 대한 저항의 결과다. 본정통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낳은 사생아다. 철저히 지배와 수탈을 위해 세운 근대도시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곳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오래된 기억도 그곳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 원평동 일제강점기 평택군청과 경찰서 자리
▲ 원평동 옛 평택금융조합 터

■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평택장
평택역전에 평택장이 개장한 것은 1910년대 초부터다. 평택장은 본정통 평화병원 우측으로 형성되었다. 평택장의 대표적 거래품목은 평택평야의 쌀이었다. 1913년 경기도 기록에도 평택장의 미곡상은 15명이 넘었다. 많아야 5명 아니면 한두 명에 불과했던 다른 품목의 상인들과는 대비되는 숫자다. 미곡과 함께 거래량이 많았던 것은 소금과 해산물이었다. 미곡이 거래되었던 골목을 ‘싸전골목’이라고 했다. 싸전골목은 동화병원에서 평택농협 원평지점 방향으로 길게 이어졌다. 소금과 해산물을 거래했던 ‘진전거리’는 싸전거리 우측 골목에 있었다. 평택장의 소금과 해산물은 군문포와 화포·신덕포를 통해 들어왔다. 한국전쟁 이후까지 평택장터에서 살았던 이감O(1927년생) 씨의 시댁은 이성상회라는 건어물 도매상을 했다. 해방 직후 건어물 도매상이 취급했던 품목은 동해의 북어, 남해의 김과 미역, 서해의 각종 생선이었다. 건어물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함경도 원산에서 들어왔지만, 분단 뒤에는 포항이나 부산에서 왔다. 평택역에 우택(우체국 소포)이 도착하면 대기하고 있던 트럭들이 상품을 실어 날랐다.
일제강점기 원평동 골목에는 평화병원·동화병원과 같은 병원들이 많았다. 병원들은 대부분 조선인 의사가 진료했지만 국도 1호선 변의 치과는 일본인이 의사였다. 시장규모가 커지면서 평택초등학교 자리에 우시장을 개장했다. 우시장 뒤쪽에는 목돈을 만지는 소장수들을 상대로 주막이 발달했다. 시장골목 북쪽에는 진위군청과 경찰서가 담장을 맞대어 있었고 그 다음 블록에는 세무서가 있었다. 지금처럼 군청 주변에는 중국식당들이 있었다. 통복시장에서 중국식당을 운영하는 왕본동(1934년생) 씨는 자신의 부친도 1920년대 군청 옆에서 중국식당을 냈고, 처갓집은 그 이전부터 운영했다고 말했다. 중국식당은 ‘청요리집’이라고 불렀다. 실제 판매하는 음식들도 지금처럼 짜장이 아니라 중국요리가 중심이었다.

▲ 통복동 마방과 국도 38호선
▲ 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통복동 경기소금공장
■ 한국전쟁 뒤 중심거리로의 지위 상실
일제강점기에는 통복지하도 입구를 삼거리라고 불렀다. 삼거리는 국도 1호선과 안중방면으로 나가는 국도 38호선의 갈림길이었다. 국도 38호선이 지나는 골목에는 마방과 주막·떡 방앗간· 이발소·제재소·자전거점·정육점이 있었다. 박명○ 씨 부친이 운영했다는 마방에서는 십 수 대의 마차가 운영되었다. 마방의 마차들은 평택역으로 실려 오는 대한통운 화물을 운송했다. 주민들은 통복지하도 근처 사업가들 상당수가 과거 마방과 관련 있다고 귀띔해 줬다. 마방 맞은편에서 경기소금공장을 하는 최정O 씨는 50여 년 전부터 소금공장을 운영했다. 한 때는 형님에게 공장을 맡기고 남도를 떠돌았지만 다시 통복동에 정착하여 소금공장을 운영한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소금은 평택지역의 특산품이었다. 처음에는 자염을 생산하다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뒤에는 천일염이 생산되었다. 서평택지역의 천일염은 안성천 수로를 통해 들어와 평택장에서 거래되었다. 경기소금공장에서도 옛날에는 서평택지역의 천일염만을 가공 판매했다. 하지만 염전들도 문 닫고 중국산이 들어오면서 지금은 그러지 못하다.
원평동은 한국전쟁 때 유엔군 폭격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초기 폭격은 평택역을 날려버렸지만 2, 3일 후의 폭격은 본정통을 비롯해 평택장 일대를 불태웠다. 전후 폐허복구가 힘들어지자 평택역·군청·경찰서·시장이 차례로 철둑너머로 이전했다. 관공서와 시장이 옮겨가면서 공무원들과 상인들도 원평동을 떠났다. 본정통에서 사업을 하는 오종O(1948년생) 씨는 40여 년 전 본정통은 집도 많지 않았고 농사짓는 사람과 지영업자·고물상·미장공이 뒤섞여 살았다고 말했다. 낮선 이방인들의 도시였던 원평동이 최근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평택역 민자역사를 건설하며 원평동 방면으로 통로와 광장을 건설한 것이 변화의 신호탄이었다. 근래에는 땅값도 오르고 상권도 살아나는 조짐이다. 그것이 옛 영광의 재연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 원평동 옛 방학소주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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