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복시장의 기원은 평택장이다
평택장은 1905년 1월에 개통된
경부철도 평택역 주변에 발달한 장시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통복전통시장 / 드론촬영 박성복 사장

평택지역의 장시는 진위면 봉남리나
팽성읍 객사리 같은 행정의 중심지,
경양포나 옹포·동청포와 같은 포구주변
삼남대로나 충청수영로와 같이
육로교통의 요지에 나타났다.
진위면 봉남리 진위읍내장
팽성읍 객사리 평택읍내장, 안중읍에 안중장
포구주변에 발달했던 청북면의 신포장
고덕면 동청포의 장시
서평택지역 육로교통의 요지였던
청북면 한산3리의 너더리장
진위현 해창으로 가는 신장동 ‘새장터新場’
삼남대로와 충청수영로의 분기점이었던
소사동의 소사장이 그것이었다.

 

3 - 쇠락과 재생의 갈림길에 선 통복시장골목-1

 이촌향도하였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터였던 골목길. 누구에게는 문학이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었으며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했던 그 길을 따라 함께 기억여행을 떠난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도시의 골목길’을 연재한다. 도시의 골목길을 통해 평택사람들의 삶을 따라가 보자. - 편집자 주 -

▲ 통복전통시장(1990년대)

■ 시장市場은 교환경제의 산물
원시공동체사회에서는 소유 개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도구가 발전하고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사적소유개념과 함께 잉여생산물을 주고받는 교환경제가 나타났다. ‘장시場市’라고 부르는 지방의 정기시는 조선 전기에 처음 출현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는 농업생산력이 발전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행정의 중심이거나 교통이 발달하여 생산물의 집산이 편리한 지역에서는 큰 규모의 장시가 나타났다. 인근의 크고 작은 장시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오일장을 형성한 것도 조선 후기였다. 대구 약령시처럼 지역에 따라 특정 상품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특화시장도 나타났고, 시장 안에서도 싸전·쇠전·생선전·포목전처럼 상품의 특징과 종류에 따라 일정한 구역이 나눠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장시가 가장 크게 증가한 것은 일제강점기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식민지 시장정책과 근대교통의 영향으로 교통의 요지마다 새로운 시장이 발생했다. 시장의 수가 많아지면서 시장의 기능도 다양해졌다. 3.1운동 때는 동일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특징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가까운 친척이나 벗들과의 만남, 이동 영화관이나 서커스, 악극단의 공연, 신탁통치 반대와 같은 정치집회도 장마당에서 개최되었다. 
조선후기 평택지역에도 장시場市가 발달했다. 평택지역의 장시는 진위면 봉남리나 팽성읍 객사리 같은 행정의 중심지, 경양포나 옹포·동청포와 같은 포구상업이 발달한 포구 주변, 삼남대로나 충청수영로와 같이 육로교통의 요지에 나타났다. ▲진위면 봉남리 진위읍내장 ▲팽성읍 객사리 평택읍내장 ▲안중읍에 안중장 ▲포구주변에 발달했던 청북면의 신포장 ▲고덕면 동청포의 장시 ▲서평택지역 육로교통의 요지였던 청북면 한산3리의 너더리장 ▲진위현 해창으로 나가는 요지에 형성된 신장동의 ‘새장터新場’ ▲삼남대로와 충청수영로의 분기점이었던 소사동의 소사장이 그것이었다. 
근대교통이 발달하고 행정과 상업의 중심이 크게 바뀐 일제강점기에는 전통의 진위읍내장이나 평택읍내장, 근대교통에서 비껴난 소사장과 너더리장, 포구의 역할이 줄어든 동청포와 신포장이 쇠퇴하거나 폐장된 반면, 평택역과 서정리역 주변에 형성된 평택장이나 서정리장, 국도 38호선과 39호선의 교차점인 안중장, 국도 38호선의 요지에 발달한 숙성리장(오성장)처럼 근대교통과 연결된 장시들이 크게 성장했다. 일제 말에는 진위면 하북리 등 공출미가 집산되었던 지역에 장시가 발달하기도 했다. 이들 장시들은 1970년대까지 크게 발달했다가 1980년대 이후 도시화·산업화로 인한 이촌향도로 농촌인구가 급감하고, 유통구조가 크게 바뀐 데다, 젊은 층의 소비방식이 대형마트나 백화점으로 옮겨가면서 쇠퇴하였다.

▲ 통복전통시장 어물전(2009년)

■ 평택장인가 통복시장인가?
통복시장의 기원은 평택장이다. 평택장은 1905년 1월에 개통된 경부철도 평택역 주변에 발달한 장시였다. 일제강점기 평택장은 철도와 근대교통의 요지인데다 육로와 수로교통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크게 성장했다. 평택장의 대표상품은 미곡米穀이었다. 평택장의 미곡은 평택평야가 간척되면서 더욱 늘었으며 나중에는 안성이나 이천·아산의 미곡까지 집산되면서 크게 성장했다. 아산만과 경기만 일대의 소금과 생선·건어물도 평택장의 주요 상품이었다. 나중에는 우시장까지 성장하면서 공히 경기남부지역의 대표적 장시로 발돋움했다.
성장을 거듭하던 평택장이 어려움에 봉착한 것은 해방 후다. 해방 이듬해 속칭 ‘병술년 물난리’를 겪으며 시장이 침수되었으며 한국전쟁 초기에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봤다. 한국전쟁 당시의 폭격은 물질적 피해보다 군청과 경찰서·평택역과 같은 주요 관공서와 공공기관 그리고 시가지의 중심을 철도 동쪽으로 이전시키면서 시장까지도 이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평택장의 이전논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대체로 철도역과 군청·읍사무소·경찰서가 1953년 말에서 1954년 사이에 이전했으므로 이 시기부터 논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철도역이 동쪽으로 이전하면서 평택동 일대에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다. 군문동을 거쳐 원평동 방향으로 향했던 국도 1호선까지 유천동에서 평택역 앞을 지나 시장로터리 통복동 삼거리 방향으로 바뀌면서 시장 이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실적 과제가 되었다.
통복시장에서 포목점을 운영했던 정진현(가명, 1916년생) 씨는 시장이전 시기를 1956년으로 기억했다. 4대째 평택장(통복시장)에서 건어물상을 운영하고 있는 이도훈(1925년생) 씨도 비슷한 시기에 이전했다고 증언했다. 시장이전을 주도한 것은 ‘평택읍’이었다. 평택읍에서는 공터와 황무지, 사과 과수원뿐이었던 통복동 서삼거리와 동삼거리 사이에 시장을 조성했다. 새시장이 조성되고도 구 평택장 상인들은 한꺼번에 옮겨가지 않았다. 시장이전은 대체로 1950년대 말쯤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은 이전된 시장을 ‘통복시장’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매월 5일, 10일에 개장하는 오일장만큼은 ‘평택장’, ‘평택장날’이라고 부르고 있어 어느 것이 정통인지 아리송하다.

▲ 통복전통시장 가구거리(2015년)

■ 시장에도 질서와 룰이 있다
시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질서해 보인다. 무질서의 주범은 시장 통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노점상들이다. 통로 좌우에는 엄연히 비싼 세금과 점포세를 지불하고 상품을 판매하는 점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버젓이 비합법적으로 통로 중앙을 차지하고 상행위를 하는 모습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합리적이고 무질서해 보이는 사장 안에도 엄연한 질서가 있다. 상인들은 일정한 룰을 지키며 각자의 구역에서 상행위를 한다. 서울의 시전市廛도 그랬다. 조선 초기만 해도 흙바닥에 상품을 진열해 놓고 물건을 팔다가 세종 때 종루에서 흥인지문에 이르기까지 행랑과 점포를 마련하면서부터는 상품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 면포전·면주전·지전·저포전·어물전·싸전 등 일정한 구역을 나눠 장사했다.
통복시장의 중심은 뭐니 뭐니 해도 싸전과 포목전·어물전 그리고 우시장이었다. 한국전쟁 뒤 평택읍에서는 통복시장을 조성하면서 일정한 구역을 나눴다. 서삼거리(시장로터리)에서 동삼거리(일명 개전로터리) 사이의 ‘큰골목’을 중심에 놓고, 큰골목의 동쪽부터 ‘작은골목(뒷골목)’ 사이에는 어물전과 건어물상들을 자리 잡게 하였으며, 뒷골목의 동북쪽에는 싸전, 동남쪽에는 포목전을 두었다. 큰골목의 서쪽은 고추와 참깨·들깨를 거래하거나 빻는 고추전골목이었다. 1980년대 전후 작은골목에서 평택농협 방향으로 삼익가구를 비롯한 가구점들이 밀집되면서 가구점골목이 되었고, 국도 38호선이 지났던 큰길가에는 은행과 전자제품·금은방·약국과 같은 점포가 있었다. 점포들 사이에도 상하 질서가 있었다. 상품을 매집하여 파는 도매상점이 있는 반면, 도매상들에게 구매하여 노점에서 판매하는 소매상들이 있었다.
평택장의 다른 한 축은 우시장이었다. 상인들은 우시장을 ‘쇠전’이라고 불렀다. 본래 우시장은 원평동 평택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통복시장이 조성되면서 시장 안 농협 뒤쪽에서 통복천 사이로 옮겼다. 우시장의 소들은 주로 평택평야의 농민들이 기른 축우였다. 농민들은 늦여름쯤 우시장에서 송아지를 사다가 겨우내 여물을 먹여 농사를 지은 뒤 다음 해 늦여름쯤 내다 팔았다. 평택우시장의 소들은 질 좋기로 소문났다. 그래서 장날이면 근동의 소장수들이 몰려들었는데, 농협 주위의 우시장이 협소하자 시장 북쪽(옛 성북파출소 뒤쪽)으로 옮겼고, 나중에는 모곡동으로 옮겼다가 폐장되었다.<계속>

 

▲ 통복전통시장 고객센터 준공(2014년 7월)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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