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길을 걸으며
숲과 호수의 소리를 듣고
우리의 삶이 얼마나
순자연적이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이 아름다운 호수가 끝까지
사람들의 손길을 타지 않은
자연으로 남기를 바란다

▲ 이경남 시인·목사/효덕감리교회

안성에는 고삼지라는 호수가 있다. 주변이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오염이 적고 물이 맑아 우리나라 10대 아름다운 저수지에 뽑힐 정도로 경치도 좋다. 고삼초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 꺾어진 오르막을 오르면 이내 하얀 기포를 내뿜으며 무너미를 넘는 물소리와 함께 호수 전체의 전경이 펼쳐지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봄철에는 주변의 파릇한 신록이나 개나리 벚꽃과 어울려 아름답고, 여름 장마로 비구름과 안개가 내리면 이건 한 폭의 한국화가 된다. 가을이면 물도 더욱 맑아지고 단풍이나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참 고즈넉하여 알 수 없는 애수를 불러일으킨다. 눈 날리는 한 겨울은 한결 애처롭고 평온하다. 얼어붙은 호수 위로는 눈발이 날리고 아직 얼지 않은 물에서는 멀리 북국의 어디쯤서 날아 온 듯한 청둥오리 떼가 무리지어 자맥질도 하고 물가에 앉아 졸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 보는 이의 마음에 큰 안식을 준다.

이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다 보면 십여 호의 농가들의 모여 사는 꽃뫼 혹은 꼴미 마을이 나오고 낚시터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삼은리까지 산길이 나온다. 한없이 호젓하기 만한 이 길에서 솔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산새들의 조용한 합창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삼은리를 지나 왼편으로 지방도를 조금 걷다 보면 자그마한 서삼초교가 보이고 여기를 지나 한참을 더 걸으면 길이 또 갈라진다. 곧바로 가면 용인이고 왼쪽으로 돌면 고삼인데 왼쪽을 택해 조금 걷다 다리 건너 왼쪽 길로 들어서면 고삼호 상류에서 호숫가를 따라 난 조용한 산책로를 걸을 수 있다.

양촌낚시터를 지나면 이제 호숫가를 떠나 산길로 접어든다. 한참을 걷다보면 지방도가 나오고 월향리 앞에서 다시 호숫가로 들어갈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다시 호수 전체가 보이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는데 비가 내리면 걷기조차 힘든 진흙탕이지만 그래도 경치만은 나무랄 데 없이 좋다. 이 길 끄트막에는 몇 채의 별장들과 소로리낚시터가 나오는데 여기는 길이 다 포장이 되어 참 깨끗하다. 한 때 숲속의 사계라는 운치 있는 찻집도 있었는데 여주인이 외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듯 많은 예술·문학·철학서적들과 진흙으로 손수 빚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또 고풍스런 하이델베르크를 연상시키는 이국 도시의 미니어처가 있어 유럽의 향취를 느끼게도 하던 곳이다.

다시 호수를 벗어나 도로로 들어서 올라가다 보면 고삼호 제방이 나오는데 이제 호숫가를 따라 한 바퀴 도는 네 시간여의 행복한 둘레길 여행을 마치는 순간이다.

내가 이 고삼호를 처음 만난 것은 40대 중반 내 인생이 가장 깊은 어둠에 놓여 있을 때이다. 내 인생에 불어 닥친 이 사악한 폭풍은 내 육신과 영혼에 너무 큰 고통의 흔적을 남겼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흔들리고 방황하던 내게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호수가 나타났고 나는 이 호수를 찾으며 육체와 마음에 치유와 위로를 만들어갔다. 아침 일찍 이 호숫가에 나와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고 한적한 산길을 홀로 걸으며 하루를 다 보내곤 했다. 그러면서 호수에 대한 사랑은 깊어져 갔다. 꽃뫼 찻집 마당에서 시작해 크고 아름다운 호수를 돌아 다시 돌아오는 데는 반나절이나 걸리지만 이 푸근한 자연의 품에 안기는 순간은 늘 기쁨이고, 설렘이고, 치유고, 회복이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며 숲과 호수의 소리를 듣고 우리의 삶이 얼마나 순자연적이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나는 이 아름다운 호수가 끝까지 사람들의 손길을 타지 않은 자연으로 남기를 바란다. 무례한 낚시꾼들이나 이익에 눈멀어 산과 강을 파헤치고 이 맑은 호수에 오폐수를 쓸어 넣는 개발업자들과 지각없는 통치자들의 야욕을 피하고 도시의 탐욕과 분주함에 넌더리를 낸다. 그리고 이곳을 그리는 수많은 자연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삶과 문명을 꿈꾸는 윌든이 되고 젊은이들이 사랑을 고백하거나 시를 짓는 추억의 호수로 남기를, 아니 워즈워드가 노래한 와이강변의 수도원처럼 한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자연 속에서 신의 뜻과 음성을 구하는 경건하고 선한 구도자들의 영감과 묵상의 처소로 남겨 지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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