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서열화 위에는
학력·학벌구조가 있고
그 위에는 직종 간 임금격차와
특정직업 진입장벽이란 구조가 있다.
이런 구조를 개인이
뛰어넘을 수는 없다.
사회전체가 대오 각성해
바꿔내야 한다

▲ 심우근 교사/비전고등학교

바야흐로 졸업 철이다. 지난 1월 6일 장당중학교를 시작으로 2월 초까지 초·중·고교들이 졸업식을 한다. 졸업이란, 말뜻 그대로 배우고 익힘의 마무리다. 차분히 지난 배움을 돌아보고 새 발길을 다잡는 날이다. 이 즈음이면 시·도교육청에선 졸업식 때 학생 일탈을 예방하라며 각 학교로 단호한 공문을 몇 차례나 보낸다. 일부 졸업생들이 후배들을 모아놓고 가혹한 짓을 한다든가, 알몸 코스프레를 해대기 때문이다. 왜 이들은 그러는 것일까? 아이들만 나무라기 전에 그런 까닭을 따져보자. 현상은 구조에 터한다. 빵빵한 풍선 한순간 터지듯 아이들이 품었던 불만이 졸업식 날 뻥 터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 학교들은 거대학교다. OECD 기준으로 보면 두 세 개로 나눠야 할 학교가 많다. 학급당 인원도 많다. 2016학년도 평택 고교 신입생 학급정원이 37명이다. 좁은 공간 안에 넘치는 인원을 수용하려니 강한 집단규율이 필요하다. 학교 밖 가정에서나 개인으로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옷매무새(교복 겉옷, 규정 셔츠, 타이 착용여부 등), 규정한 가방, 금지한 개인물품(갖가지 화장용품, 고대기, 일과 중 휴대전화 등) 소지 여부, 학교 안팎 행동 규칙들로 시시콜콜 매우 엄하고 불편하게 아이들을 옭아맨다. 찰싹 달라붙는 옷차림 유행으로 손대면 톡하고 터질듯 한 양복, 양장형의 교복을 하루 10~12시간씩 3년간 입고 일상을 보내야 한다. 어른들이여, 자신이 몸에 착 달라붙는 양복 입고 12시간씩 3년간 지내는 걸 상상해보시라.

이런 집단 수용소를 마침내 벗어나는 날, 졸업은 곧 해방이리라. 특히 억압의 상징이 된 교복, 게다가 어떤 학교는 공부 못하는 학교란 딱지까지 붙은 교복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도 싶을 게다.

졸업식 날 졸업장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 ‘졸업장’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잘 알다시피 한국 교육열은 세계 1위다. 대학진학률이 2005년 82.1%로 최고였다가 2010년 79%, 2015년 70.8% 내려왔지만 여전히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이다. 공부시간도 우뚝 1위이다. 국제학력평가 1위인 핀란드 학생들이 정규수업 외 주당 7시간 공부하는데, 평가순위 2~3위인 한국 학생들은 주당 20시간이나 공부한다. 거의 세배다. 한국 학생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장 오래 공부한다. 이런 결과로 한국의 학문과 문화수준이 높아진다면 당연하겠으나 현실은 아니다. 비효율의 극치다.

교실에서 바라보면 많은 학생들은 공부를 거의 본능으로 싫어한다. 절레절레 넌더리를 낸다. 어릴 적부터 억지 학습에 찌들어 새로 배워 익히는 즐거움을 모르거나 잊었기에. ‘대학’은 말 뜻 그대로 큰 배움터다. 중·고교 공부와는 차원이 달라야 한다. 헌데, 공부에 그토록 진저리를 치는 아이들이 큰 배움터인 대학에 기를 쓰고 가려하는 까닭은?

한국사회가 학력·학벌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하는 대학 서열명부가 떠돈다. 대학을 학문 특성이나 통학 접근성 등이 아니라 학생의 성적에 맞춰 고른다. 겨우 스무 살까지 거둔 입학 당시 상표를 이마에 문신으로 새겨 그의 능력을 평생토록 평가한다. 초·중·고교는 대학입학을 위한 준비 단계일 뿐, 상급학교에 가기 위해 줄 세워주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고등학교 안에서 하는 모든 활동의 의미여부는 자신의 대학입학에 도움이 되느냐이다. 옳고 그름이나 바른 인간성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가짐 등은 사치다.

대학서열화 위에는 학력·학벌구조가 있고, 그 위에는 직종 간 임금격차와 특정 직업 진입장벽이란 상위구조가 있다. 이런 구조를 한 개인이 뛰어넘을 수는 없다. 사회전체가 대오 각성해 바꿔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을 두고 벌이는 수많은 행위들 따져보면 무의미한 이전투구가 많다. 저 아이보다 내 아이를 몇 발자국 앞세우려는 욕심에 학원과 과외와 인터넷 강의가 차고 넘친다. 입시학원이 상장기업이 됐고 입시산업이란 말까지 생기며 번창한다. 교육이 사회발전의 동력이 아니라 낭비와 비효율, 부조리의 기둥이 돼버렸다. 이마에 새겨진 학교 상표보다 그의 능력과 가능성을 높이 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직업 선택의 장벽을 허물고 직종 간 임금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대다. 졸업식을 바라보면서 졸업장이 별 쓸모없을 내일을 상상한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