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의 바탕에는
그의 순수한 서정적 감성뿐 아니라
그가 자라난 명동촌의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깔려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그들의 청춘을 통해
새로운 동기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영화 동주가 우리 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 속 두 주인공 윤동주와 송몽규가 태어나고 자라며 그들의 사상과 영혼의 토양이 된 명동촌의 역사를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일제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우리에게 영원히 아름다운 청춘으로 남은 두 사람의 이면에는 ‘명동촌’이라는 우리가 기억해야할 감동적인 역사가 있다.

간도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접하고 있는 만주벌판을 이르는 말이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간도와 서간도 그리고 북간도로 크게 나뉘는데 지금의 연길·화룡·왕청·훈춘을 포함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청과 조선 사이의 영토분쟁으로 민감했던 이 지역에 조선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70년경, 조선에 큰 기근이 들어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지면서부터다.

한일합병 이후 새로운 땅에서의 자유와 꿈을 가진 이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함북 종성의 무관 출신인 김약연이 뜻을 같이하는 25세대 142명의 사람들과 함께 집단 이주한 것은 1899년 2월 18일, 그의 나이 31세 때였다. 이들은 화룡현 불굴나재라는 곳에 일천경(약 600만평)의 땅을 구입해 정착하는데 이중 십분의 일은 학전으로 구별해 후손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한다. 이른바 명동학교 즉 동쪽인 조선을 밝힌다는 민족의식이 담긴 학교다. 김약연이 세운 이 학교의 첫 교육 역시 유교 교육이었다.

그러나 신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에서 이를 담당할 만한 유능한 교사를 초빙하는데 이 때 명동 학교에 교사로 초빙되어 온 이가 서울 상동교회에서 세운 상동학원 출신의 정재면이다.

정재면을 비롯한 유능한 교사들의 수고에 힘입어 명동학교는 짧은 기간에 북간도에서 명성을 얻고 우수한 젊은이들이 모여 드는 명문 학교로 자리 잡는다. 김약연은 간도지역 자치기구인 ‘간민회’ 결성을 주도해 회장을 맡았으며 1918년 만주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인 ‘무오독립선언’에도 참가했는데 그의 폭 넓은 활동과 영향력으로 인해 간도 대통령 혹은 한국의 모세라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윤동주는 명동교회 장로이면서 명동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윤하영 장로는 김약연과 함께 명동촌을 개척한 초기이주자였고 어머니 김룡은 김약연의 누이동생으로 윤동주는 김약연의 조카이자 제자다. 1925년 명동 소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으며, 중국의 관립소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모두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해 공부한다.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하고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2년, 1942년 도쿄에 있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해 1학기를 마치고,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한다. 그러나 1943년 7월 반일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송몽규와 함께 검거돼 각각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송몽규의 부친 송창희 역시 명동학교 교사였고 몽규는 동주의 고종사촌 형이었다.

그리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3월 10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중에서 옥사하는데 사망 원인은 주사를 통한 독극물 투입이었다. 이들의 유해는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인 장재촌 뒷산에 묻혔다.

1968년 윤동주의 모교인 연세대학교는 교정에 그의 시비를 세운다. ‘별 헤는 밤’이나 ‘서시’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애송하는 아름다운 시인데 이런 윤동주 시의 바탕에는 그의 순수한 서정적 감성뿐 아니라 그가 자라난 명동촌의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깔려 있다. 모쪼록 영화 동주를 통해 오늘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청춘을 엿보며 새로운 동기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