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츠페터는
충실한 현장 역사가였다.
그러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현장에 있는가?
아니면
단지 구경꾼일 뿐인가?

 

▲ 심우근 교사/
비전고등학교

오늘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다. 올 기념식에서도 5·18 상징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않을 거라는 뉴스가 뜬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이 북한 김일성을 상징한다는 해괴한 유언비어를 이유로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한 보훈처의 처사에 반발해 몇 년 전부터 시민단체들은 따로 기념식을 해 왔다. 이 노래의 성격이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법으로 규정한 성격마저 부정하며 북한 관련설을 믿거나 이른바 전두환 신군부의 논리로 ‘광주사태’라 억지 부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어 놀랍다.

국정 역사교과서 억지강행 파동은 아직 진행 중이다. 진보 시민단체들은 복면집필자 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교육부는 교과서 제작의 모든 과정을 낱낱이 공개 하겠다 해 놓곤 말과 행동을 180도 바꿔 현재 ‘복면집필’ 중이다.

역사는 바뀐다. 단순한 사실 나열에 불과한 연대기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 사실 그 자체, 역사상 진실 기록이란 처음부터 없었다. 당시 그 일을 기록한 사람 자신의 주관으로 역사 사실을 취사선택하고 나름대로 기록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평가할 때 개인이나 그 정부의 일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든,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사안별로 평가하든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범역사학계가 대체로 합의한 평가나 연구결과를 외면하고 특정한 관점으로 역사를 비평, 서술하고 이를 교과서로 만들어 온 나라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는 발상은 독재시대에나 가능한 역사의 퇴행이다.

율곡 선생은 “한 나라 사람이 의논하지 않고도 똑같이 옳다 하며, 이익으로 유혹하거나 위엄으로 무섭게 하지도 않으며, 어린 아이도 그 옳음을 아는 것”을 공론公論이라 했고 공론이 곧 나라의 원기元氣라 했다. 지금으로 치면 이른바 보편적인 시민의식이리라. 인권, 생명 존중, 생태보전, 평화, 평등, 반독재, 반전, 반부패…, 이런 기준으로 역사와 인물을 평가하고 서술하여 가르침이 박대통령이 말한 ‘올바른’ 역사가 아니겠는가?

역사기록과 역사교과서 집필, 역사교육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중에 오늘 5·18을 맞으면서 한 사람을 기억하려 한다.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1937~2016)’이다.

독일 제1공영방송의 도쿄특파원이었던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때 신군부의 언론 통제로 국내에선 취재나 보도가 금지됐던 광주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다.

1980년 5월 20일 일본에서 날아온 그는 계엄군의 감시망을 뚫고 광주로 진입해 23일까지 생명을 걸고 현장을 취재했다. 곤봉과 총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무방비 상태의 시민과 학생들을 무차별로 살상하는 만행, 어린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울부짖음 등은 차마 보지 못할 장면들이다. 오늘날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영상자료는 거의 그의 필름이다. 5공 말기인 1986년 11월 광화문에서 시위를 취재하다 사복경찰에게 얻어맞아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기도 했다. 2005년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러 다시 온 그는 “벌써 25년이 흘렀다. 광주시민과 한국민들은 1980년 5월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며 광주 5·18묘지에 묻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가족묘에 묻고 싶어 하는 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손톱과 머리카락을 담은 편지봉투만 광주에 남기고 독일로 돌아갔다. 지난 1월 그가 죽자 5·18 재단은 고인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망월동 묘역에 안장하는 방안을 5월 단체, 광주시 등과 논의해 왔고 2016년 5월 16일 고인의 부인과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망월동 묘역에 안치했다.

기자라는 직업 소명의식이든 기록자란 역사의식이든 힌츠페터는 충실한 현장 역사가였다. 그러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현장에 있는가? 아니면 단지 구경꾼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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