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그토록 추앙받아
마땅한 인물인가?
위의 역사 사실들을
알고도 그런가? 몰라서 그런가?
의문이 꼬리를 무는
유월을 보낸다

 

   
▲ 심우근 교사/
비전고등학교

이승만을 둘러싼 인식 차는 매우 크다. 한 쪽은 외교 독립론을 주장한 독립운동가, 건국의 아버지, ‘국부’라 부르고 한 쪽은 독립운동 자금 착복, 권력 연장을 위해 헌법을 누더기로 만들고 정적을 사법 살인한 독재자, 4·19 학살의 책임자로 부른다. 유월을 맞아 이승만과 유월에 얽힌 세 건의 이야기를 풀어보며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를 따져보려 한다.

첫째, 해방 다음해인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처음 주장했다. 이른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다. 6월 4일엔 전주, 6월 5일엔 이리에서도. 남북 분단의 씨를 뿌린 것이다. 김구, 여운형 등 민족독립운동 진영은 크게 놀랐고 특히 김규식은 “(단독정부수립 운동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자본가들의 이익을 테러로 옹호하면서 민족분열을 내란으로 하고, 극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권이라도 세워보자는 가공 가증의 음모”라며 이승만을 공개 비난했다. 분단이 곧 전쟁으로 치달음을 이때 김규식은 예견했던 것이다.

둘째, 남북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김구 등 민족독립운동 세력이 불참한 5·10 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헌법 조항에 따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 미국으로 도망하려던 박흥식 체포를 시작으로 이종형·방의석·김태석·이광수·최린·최남선·김연수 등 널리 알려진 친일파들을 잇달아 잡아들였다. 국민들은 친일파의 행적을 증언, 제보하며 높은 관심과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그러나 친일파의 구심이 돼 버린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을 반대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며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반민특위를 불법으로 몰고 친일파를 감싸 안았다. 악질 친일파로서 서울시경찰국 사찰과장에 오른 최운하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내무부 차관 장경근의 주도로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 특경대 대원을 체포하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로써 반민족 친일파 척결이라는 민족 절대 과업은 좌절됐고 친일파들은 면벌부를 받아 지금 보듯 한국의 지배세력으로 우뚝 서서 사회 정의는 무너지고 기회주의, 이기주의,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토대가 됐다.

셋째, 6월 25일 김일성의 전격 남침에 화들짝 놀란 이승만은 밤 10시 반경 맥아더에게 전화로 도움을 요청한 뒤 27일 새벽 2시, 특별열차를 준비시켜 각료들과 함께 대구로 피신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비굴한 피신과 견줄 도망이었다. “너무 많이 내려온 것 아니냐?”는 측근의 지적에 대구에서 다시 대전으로 올라온 그는 국영 대전방송국에 명령하여 녹음시설을 가져오게 해 녹음을 했다. 마치 서울에서 직접 말하는 것처럼.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수도 서울을 사수할 것, …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적을 추격 중, …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시오”

이래 놓고 이승만은 28일 새벽 2시 한강다리 폭파를 지시한다. 정부 발표를 믿지 못하던 많은 시민들이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다. 때 이른 다리 폭파로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북한군 탱크가 한강 이북에 나타났다.

이밖에도 유월과 관련한 사건들은 10~12만 명을 굶기고 얼어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 집단사망사건’ 등 많지만 위 세 가지 경우만 놓고 볼 때 과연 이승만은 그토록 추앙받아 마땅한 인물인가? 위의 역사 사실들을 알고도 그런가? 몰라서 그런가? 의문이 꼬리를 무는 유월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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