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3월 11일


 

 

 

포승면 내기리 임 모 마름, 소작인 착취
소작권 빼앗기자 농회장에 진정서 제출

 

“경성 황금정(京城 黃金町) 三정목 리모(李謀)는 작년 五월 중에 진위군 포승면 도곡 내기리(振威郡 浦升面 道谷 內基里) 등지에 있는 논 四十여 석 지기를 동면에 있는 만호리 조길구(晩湖里 趙吉九) 씨로부터 매수하여 동면 임모(林謀)로 하여금 관리케 한 바, 임씨는 추수 후에 백여 명 소작인에 대하여 매인이 일간씩 제방 수축에 출역케 하며, 또 매 두락에 고초(藁草) 다섯 묶음씩 가져오게 하고도 종말에는 소작권을 빼앗음으로 소작인들은 극도로 분개하여 군농회장(郡農會長)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다고 한다”(동아일보, 1931년 3월 11일)

지금이야 소작인이 많지 않지만 일제강점기만 해도 적지 않았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토지조사사업을 단행함에 따라 당시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겼으며, 일본인의 이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이주한 농민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 경우 소작인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1920년대 들어 산미증산운동과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했지만 정작 농민들의 삶은 더 척박해져 갔다. 그러는 동안 소작인의 생활은 그야말로 힘겨운 보릿고개를 겪어야만 했고 때에 따라서는 초근목피하면서 지내야만 했다.

이 시기 소작인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가 마름舍音이었다. 모든 마름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종종 악덕 마름이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해 소작쟁의가 자주 일어났다. 악덕 마름은 어디에나 있었는데 평택에서도 악덕 마름으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31년 3월경 포승면 도곡 내기리에 ‘임 모’라는 마름이 있었다. 그는 서울에 사는 지주 이  모 씨의 토지를 관리했는데 소작인을 적지 않게 괴롭혔다. 원래 토지 소유주는 조길구였는데 이를 서울의 이 모 씨가 샀다. 그렇지만 직접 내려와서 관리할 수가 없어서 임 모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마름 임 모는 가을걷이를 한 후에는 자신이 관리하는 100여 명의 소작인을 하루씩 제방공사에 동원했다. 이외에도 매 두락마다 볏짚藁草 다섯 묶음을 가져오도록 했다. 이른바 마름의 ‘갑질’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결국에는 소작권까지 빼앗아 버렸다. 이에 분개한 소작인들은 진위군 농회 책임자에게 진정서를 내면서 저항했다.

한편 땅을 판 조길구는 지역 유지로 1921년 4월 15일부터 2주간 일본시찰에 참가한 바 있으며 1930년 보릿고개 시절에 넉넉한 삶도 아니었지만 자선사업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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