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7월 11일

 

 

일제강점기 ‘국어’는 한글이 아니라 ‘일본어’
당시 ‘전국 제일의 강습회’라고 기사로 표현

“경기도 평택군 평택읍(平澤邑) 국방부인회와 애국부인회 공동 주최의 국어강습회는 십일일 오후 두 시부터 군청에서 수업식을 거행하였는데, 도로부터는 일야(日野) 사회부장과 감서(甘庶) 지사, 이(李) 참여관 부인도 출석하였는데, 수강자는 일백 칠십 명 최고 칠십 세의 나이 많은 부인도 있는 등 그 성적이 보랄만 한 바 있었다”(조선일보, 1939년 7월 12일)

1910년 8월 28일 나라를 빼앗긴 이후 나라말이 없어졌다. 이때부터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사용됐던 ‘국어’는 ‘일본어’였다. 국어라는 말 대신 ‘조선어’라 불리며 그 명칭도 격하됐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국어’라는 뜻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한글이 아니라 일본어였다. 종종 ‘국어강습회’라고 하면 ‘한글강습회’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등 전시체제가 확립되면서 일제는 이른바 ‘민족말살정책’을 강력하게 시도한다. 그 중의 하나가 일본어 보급이었다. 학교에서도 조선어 수업시간이 단축되거나 아예 과목마저 폐지되기도 했다.

일본어 보급은 정규학교 외에도 일반사회에서도 적극 확대됐다. 각 지역에는 ‘국어강습회’라는 일본어 강습회를 개설했다. 일본어강습회를 개설하는 기관은 주로 관변단체였다. 대표적인 곳이 국방부인회, 애국부인회 등이었다. 국방부인회는 중일전쟁 이후 각 지역에 조직돼 국방헌금을 모금하고 전쟁구호품 등을 헌납했다. 애국부인회 역시 국방헌금을 모금하거나 위문품 등을 만들어 헌납했다. 이들 국방부인회와 애국부인회는 주로 일본인 여성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표적인 관변단체였으며, 중요한 사업의 하나가 일본어 보급이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7월 11일 오후 평택군청 강당에서 일본어 강습회 수업식이 거행됐다. 국방부인회와 애국부인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이날 수업식에는 경기도 히노日野 사회부장, 경기도지자 간쇼甘庶의 부인, 이李 참여관 부인 등이 귀빈으로 참석했다.

수업을 받는 학생은 모두 부인으로 170명이나 됐고 나이가 가장 많은 부인은 70세였다. 당시 상황으로는 아주 고무적이고 대성황이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신문기사도 ‘조선 제일의 호성적’이라고 표현했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 ‘제일’을 지향했던 모습이 아련하게 남는다. 전국 제일의 일본어 부인강습회가 평택에서 개최됐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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