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10월 24일

 

 

 

가난했던 이충리 33호, 가뭄으로 생활고
면장 주선 가마니 생산, 서정리장날 팔아

“振威郡 松炭面 二忠里(東?里)는 三十三戶의 小貧村으로 今年 旱災를 받아서 더욱 生活上 威脅은 날로 酷甚한 데 對하여 同面 面長 元濟昇氏는 ?生産에 有利함을 力說하고 指導?勵한 結果 里民은 男女老少가 ?製造에 晝夜不休하여 그 生産額은 날로 增加된다는데, 지난 西井里 市日에 該里에서 ?販賣로 收入된 金額이 一百三十餘圓의 多額을 보게 되었다 하며, 里民들은 自今으로는 ?製造로 生活을 할 수 있게 된다더라”(동아일보, 1928년 10월 24일)

오늘 이 시점, 평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평택을 상징하는 것이 있기는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평택시청이나 거리를 보면 ‘슈퍼오닝’이라는 상징어가 여기저기 보이는데 평택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어다. 과자 이름이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다.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지역마다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상징을 많이 정하고 있다. 우리말보다는 외래어를 남발하고 있는데 이 또한 불편하다. 평택도 예외가 아니지만.

지금이야 평택하면 ‘배’ ‘쌀’ 등이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1920년대만 해도 평택하면 ‘가마니(?)’였다. 이는 평택이 쌀의 집산지로 유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무엇보다도 가마니가 필요했다. 더욱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빈촌이 많아서 가마니 짜는 것을 부업으로 권장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평택은 전국에서 ‘가마니’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1928년 당시 진위군 송탄면 이충리 동령마을은 33호에 불과한 가난한 한촌이었다. 이 해 아주 심한 가뭄이 들어 농작물이 거의 말라 죽어갈 정도였다. 안 그래도 어려운 형편인데, 가뭄마저 들어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 당시 면장이었던 원제승元濟昇은 가마니를 짜서 내다 파는 것으로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마을주민에게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적극 지도 권장해 마을주민 모두가 ‘주야불휴晝夜不休’ 즉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마니 생산하는데 참여했다. 이를 서정리 장날에 내다 팔았는데 수익금이 130원에 달했다. 가마니 짜기로 벌어들인 금액으로는 당시로서 거액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가마니를 보기도 어려운 실정이지만 당시만 해도 가마니는 평택사람들을 먹여 살리는데 가장 유용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가마니 생산을 적극 장려했던 원제승 면장은 1919년과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송탄면장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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