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5월 13일
 

 

고생고생해서 돈 모아 아들 결혼시켜
심한 간섭과 폭행, 며느리 비관 자살

“진위군 송탄면 장당리(振威郡 松炭面 獐堂里)에 사는 강봉식(姜鳳植)의 며느리인 김입분(金立分, 18)은 지난 十三일 오후 一시경 다량의 양잿물을 먹고 자살을 도모하려든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다. 전기 강봉식은 일찍 빈한한 생활을 계속하던 중 三十一세에 네 살 먹은 아들을 남겨놓고 아내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고 한다. 강봉식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의 집의 고용인이 되어 이렇게 十五六년 동안이나 천신만고를 겪어가면서 지내왔으며 다소의 돈도 모았다고 한다. (중략) 지난 十二일은 아침부터 심히 굴며 배를 두 세 번이나 맞아 급기야는 신체를 비관하고 다량의 양잿물을 마시고 있다 한다. 발견은 바로 하여 곧 평택평화의원(平澤平和醫院)에 입원 치료 중이라는데, 원래 다량으로 마시고 그 독이 내장까지를 하여 생명이 매우 위독하다 한다” (조선중앙일보, 1934년 5월 18일)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에 하루도 빠짐없이 자살 소식이 전해진다. 평택에서도 자살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1934년 5월 13일의 자살 소식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 사연인 즉 다음과 같다.

현 평택시 장당동로 불리는 장당리에 강봉식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가난했지만 27살에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4살 아들을 남겨두고 아내가 불귀의 객이 됐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머슴 등 고용인으로 15~6년을 보냈다. 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20살 먹은 아들 만석이를 결혼시키기로 하고 모곡리 김한경의 장녀 이쁜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시어머니가 없으면 시아버지 시집살이를 한다더니, 새 신부에게 시아버지는 시집살이를 독하게 했다. 매 맞기를 매일 같이 하고, 살림살이에 대한 간섭이 어찌나 심한지 지옥과 같은 삶이었다. 그러다보니 며느리는 그 지옥에서 벗어날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2년을 지낸 며느리는 1934년 5월 13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다. 이날도 아침부터 시아버지에게 배를 두 차례나 폭행 당하자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하고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고 양잿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바로 발견돼 평화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생명이 위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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