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11월 12일

 

 

1922년 8월 대홍수로 신대교 유실
기부금으로 11월 12일 새 다리 준공

“振威郡內 南面 新垈里에 在한 新垈橋는 交通上 重要한 關係를 有한 것인데, 過般 水害로 流失되었던 바, 左記 諸氏의 寄附金으로 假設工事中이더니, 去 十二日에 竣工되었더라. 朝鮮人發展會 三十圓, 米穀組合 三十圓, 繩叺組合 二十圓, 成周漢 朴商五 明柱燦 金學黙 洪鍾箕 金鍾文 金知豊 趙元載 韓昌敎 鄭鎭鳳 李成烈 南相殷 全熙敬 曺容煥 各 五圓 四十錢式” (동아일보, 1922년 11월 22일)

다리의 역사는 우리 인류의 시작과 함께 한다. 인류가 살아가면서 조그만 개천, 강을 건널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다리’다. 다리橋의 사전적 의미는 ‘물이나 협곡峽谷 따위의 장애물을 건너거나 질러갈 수 있도록 두 지점을 연결한 구조물’이다.

현대에는 다양한 재료와 설계에 예술적 미적 감각까지 더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최근 개통된 이순신대교는 2개의 주탑 사이의 경간徑間 길이가 1545m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길고, 해수면에서 상판까지의 높이 역시 80m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아 현대식 교량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평택지역은 서해안을 끼고 있고, 진위천과 안성천 등 크고 작은 강이 많아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려면 다리가 많이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의 다리는 오늘날과 같이 견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수로 인해 유실되는 경우가 잦았다.

1922년 8월 대홍수로 인해 평택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다. 오산과 서정리 사이에 있는 진위 성북천城北川이 범람해 경부선 일부가 유실됐고, 가뭄으로 늦게 심은 벼도 수해로 크게 피해를 입었다. 더욱이 안성천을 끼고 있는 신대리에서는 신대교新垈橋가 떠내려가 버렸다.

신대교는 이 지역에서 교통 상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유실됨에 따라 복구가 최대의 급무였다. 이에 따라 바로 임시 다리를 설치하는 한편 새로 다리를 놓기로 했다. 다리를 새로 설치하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는데 지역의 주요기관과 유지들이 기부금을 내 11월 12일 새로운 신대교를 준공할 수 있었다.

신대교를 설치하는데 기부한 기관은 조선인발전회·미곡조합·승입조합 등으로 20원에서 30원을 기부했다. 지역 유지로는 성주한·박상오·명주찬·김학묵·홍종기·김종문·김지풍·조원재·한창교·정진봉·이성렬·남상은·전희경·조용환 등으로 각각 5원 40진을 납부했다. 이들 중 성주한과 이성렬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재력가이며 기부를 많이 한 지역 유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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